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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넌 특별하지 않아

입력
2017.03.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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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전국소년체전 개회식에서 귓속말을 나누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왼쪽 사진). 백악관 입성 후 첫 등교하는 두 딸을 바라보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부인 미셸 오바마. 한국일보 자료사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전국소년체전 개회식에서 귓속말을 나누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왼쪽 사진). 백악관 입성 후 첫 등교하는 두 딸을 바라보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부인 미셸 오바마. 한국일보 자료사진

몇 해 전 명절이었다. 집안 어른 한 분이 딸과 며느리들에게 신문을 보여주며 말씀하셨다. “이 사람 어머니가 자식들을 방으로 매일 한 명씩 따로 불렀다는 거야. 아이와 두 눈을 꼭 맞추고선 ‘넌 정말 특별하단다’, ‘넌 진짜 대단한 아이야’ 이런 얘기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해줬다네. 그 덕분에 오늘날의 자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주 좋은 방법 같아.” 혼잣말의 형식을 띠었지만, 너희도 이렇게 자식들을 키워보면 좋지 않겠냐는 제언이었다. 포인트는 형제자매들을 한꺼번에 칭찬하는 게 아니라 한 명씩 따로 몰래 칭찬하는 것. 어머니의 일상제의 덕분에 훌륭해진 사람이 빌 게이츠였는지 마크 저커버그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저 연배의 어른에게도 부모에게 인정 받는다는 느낌이 자존감의 깊은 뿌리가 되는구나, 혼자 웃으며 며칠간 열심히 실행했던 기억만 남아 있다.

우리는 아이를 특별하게 키우라는 많은 메시지에 노출돼 있다. 분유 하나를 사도 ‘우리 아이는 특별하니까’ 더 비싼 것을 사 먹여야 하고, 학원 하나를 보내도 특별한 아이들만 다닐 수 있다는 ‘영재학원’에 보내고 싶어 한다. 특별한 아이로 키우라는 메시지는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자본의 상술일 뿐이지만, 내 아이는 특별하다는 믿음과 염원이 우리 마음 속에 창궐하므로 언제나 이 전략은 번성한다. 내면적인 것과 외형적인 것은 다르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둘은 생각보다 그렇게 분리돼 있지 않다. 특별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설령 내면에서만 꽃핀다 해도 별로 건강한 일이 아니다. 특별하다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남과의 비교, 외부의 시선을 전제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사랑 받고 인정 받는다는 확고부동한 감정은 한 인간의 존립근거이며, 이것이 심하게 결핍될 때 아이는 훼손된 인간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나는 특별하다는 자의식이 너도 특별하다는 평등의식과 병립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특별한 나’라는 선민의식은 한 인간의 정신에 그저 독약으로 작용할 뿐이다. 너무 특별하게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괴물 같은 어른이 되는지 오늘날 우리는 충격적으로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보일러 작동법을 몰라 삼성동 자택에서 떨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그래서 우리는 오래오래 기억해야 한다. 9세에 청와대에 들어가 27세에 나올 때까지 공주마마로만 살았던 그는 너무도 특별한 아이였던 나머지 온전한 삶을 살 기회를 박탈당했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그저 그런 일상을 지루하게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온전한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한다. 일찍이 소설가 마르케스가 털어놓았듯 명성은 그 본질이 파괴적인 것이어서 “사람들을 진짜 세계로부터 소외시킨다”. 그러니까 보통사람으로 산다는 건 진짜 세계에서 온전하게 전적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올 초 백악관을 떠난 미국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의 8년은 평범함과 정상성을 고수하기 위한 피나는 투쟁이었다. 외부의 시선에 노출된 공적 삶으로부터 자녀들을 보호하고 아이들이 ‘평범하기에 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매섭게 규칙을 세우고 지켰다. 백악관 직원들이라고 왜 퍼스트도터(first daughter)들에게 찬탄의 언어를 쏟아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미셸은 즉각 이들의 찬사를 제지하며 경계선을 설정했다. 백악관에 들어가 직원들에게 처음 했던 말이 “아이들 이부자리 펴주지 마세요. 청소도 스스로 하게 하세요”였다. 최저임금 직종에서 일해봐야 한다며 둘째 딸 사샤를 새벽 식당 아르바이트에 보내고, 아이들 학교 행사는 백악관 달력에 가장 먼저 표시한 후 반드시 참석했다. 보통사람으로서 누리는 온전한 삶의 경험과 감각은 제 아무리 탁월한 홍보 전략과 이미지 조작으로도 재현 가능한 게 아니라는 걸 그는 몸소 보여줬다.

덴마크 사람들이 신봉하는 얀테의 법칙(보통사람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네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남보다 더 똑똑하다고 착각하지 마라’, ‘네가 다른 이들보다 중요할 것이라 생각하지 마라’ 등으로 이뤄진 겸손의 10계명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너는 특별하라’는 정언명령이 아니다. 바로 이 보통사람의 법칙이다. 그토록 특별한 삶을 살아왔던 박 전 대통령이 새 매트리스의 비닐커버를 지금쯤은 뜯었을지 어쩔지 궁금해 하다, 내가 왜 이런 걸 궁금해 하고 있어야 하는지 마음이 답답해진다. 오늘 집에 가면 아이들을 하나씩 따로 불러 말해줘야겠다. ‘넌 정말 특별하지 않아.’

박선영 기획취재부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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