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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지식 관리 체제를 다시 세워라

입력
2018.04.25 17:33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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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 같은 을, 을 같은 갑.” 우리보다 크고 강한 나라의 지식자원을 활용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 많은 돈을 쓴다고 공공외교와 지식외교가 자동적으로 강화되지 않는다. 최근 불거진 워싱턴의 한미연구소(USKI)와 한미경제연구소(KEI)의 사례는 운영상의 문제점을 차지하고라도 접근방식에 있어 미흡했고, 외교적 결례나 공공외교 실패를 넘어 한국 지식관리 체제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묵묵히 일해 온 전문가와 지한파 인사들과 기존의 노력에 유ㆍ무형의 손해가 갔다. 여러 싱크탱크 지원 관련 소수 담당자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갑’ 같은 ‘을’을 관리하기에는 부족하다. 지식은 창출하는 것보다 관리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알만한 사람을 데려와.” 한국은 국제회의의 주요 허브이고, 각종 국제학술행사에 초청되는 외국 인사들이 많다. 다른 예산에 비해 회의비는 늘 풍족한 편이다. 하지만 비싼 항공료와 호텔 숙박료에 두둑한 보수까지 챙겨주고도, 정작 초청 인사의 지식과 정보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 15분 발표를 하고 한 시간 남짓 앉아있다가 ‘높으신 분들’ 만나러 휑하니 떠나는 초청인사 뒤를 쫓아가며 “차는 준비되셨나요?”라고 여쭙는 경우까지 있다.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금세 파악한다. 준비된 역량만큼 초청인사를 활용할 수 있다.

“풀칠을 잘해야 돼.” 정부지원 사업과 국책연구소 과제들도 지식의 질에 대한 체계적 평가보다 외형적 평가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다. 연구에 매진해야 할 고급연구진이 밤새워 담당기관 보고자료를 만들고 영수증에 풀칠을 해서 붙이는 것은 낯익은 풍경이다. 연구의 수준보다 페이지 수와 문장 중복 여부가 더 중요하고, 영수증 관리를 잘하라는 매뉴얼이 따라다닌다. 보고서는 다이어트가 필요하고, 평가는 근력운동이 필요하다.

“편수가 중요해. 남는 건 숫자야.” 대학도 예외는 아니다. 여러 평가지표를 위한 맞춤형 관리체제가 도입되었고, 양적 지표는 질적 지표를 종종 압도한다. 연구진은 배점이 높은 연구 성과물을 내놓기에 급급하다. 세계 정상급 출판사에서 나온 단행본에 실린 ‘챕터’는 국내 등재지 논문보다 높은 배점을 받기 어렵다. 평가순위는 올라가는데 연구 깊이는 따르지 못한다. 건물 많이 짓는다고 유적으로 남지 않는다. 남는 건 숫자가 아니라 명작이다.

“얼마짜리 지식인가요?” 지식의 가치가 몇 페이지인지, 몇 시간을 앉아 있었는지에 따라 기관과 등급별 정액제로 정해진 나라는 흔치 않다. 그 금액을 초과하면 부정청탁이 되어버린다. 예외는 있다. 외국인이면 된다. 그분들의 지식은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 지식을 제대로 평가할 시스템이 없으니 가치 산정도 어렵다.

평가와 관리의 후진성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지식 선진국에 들지 못한다. 이제 지식관리의 질적 전환을 시도할 때가 되었다. 일차적으로 지식을 관리하고 평가하는 전문인력과 역량을 확충해야 한다. 국내 여러 연구재단과 해외사업을 담당하는 국제교류재단을 비롯한 지원기관이 상시 평가ㆍ모니터링 담당 전문인력을 늘릴 필요가 있다. 기존의 평가 시스템에도 보다 충분한 예산과 인력, 그리고 시간을 투입해야 한다. 지식 지원사업 비용의 10%만이라도 평가와 관리에 전문적으로 투자한다면 분명 급이 다른 성과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고, 한국 지식외교의 위상을 바꿀 것이다.

지식의 경쟁력은 그것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만들어 낸 지식을 어떻게 엮어내고 관리하는가에 달려있다. 만들어만 놓으면 그대로 축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S급 인재는 으레 외국인 몫이라 생각하고, 감사에 지적되지 않을 만큼의 연구성과를 요구하는 지식관리 체제로부터의 질적 대전환이 필요하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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