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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석학 칼럼] 통증에 갇힌 사람들

입력
2018.01.14 13:33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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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법원은 지난달 320회나 이용할 수 있는 양의 트라마돌 밀수 혐의를 인정, 33세 영국인 점원 로라 플러머에게 3년 형을 선고했다. 트라마돌은 영국에서는 통증 완화용으로 처방되는 오피오이드(합성진통제)다. 이집트에서는 남용을 이유로 금지하는 약물이다. 플러머는 만성통증을 앓는 이집트 남자 친구에게 약을 먹이고 있었다며 위법인 줄 몰랐다고 했다. 영국 언론들은 의사 처방 수준을 초과한 양인데도 플러머에 동정적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플러머에 대한 유죄 판결과 형량 시비를 떠나 훨씬 더 광범위한 쟁점을 일깨운다.

지난해 10월 완화치료 및 통증완화에 관한 랜싯위원회는 심한 통증 완화가 “세계 보건 및 형평상의 의무”라는 내용을 담은 64쪽의 인상적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런 문제제기가 처음은 아니지만 이 위원회는 문제의 심각성을 입증할 다양한 증거를 함께 제시했다. 매년 2,550만 명이 모르핀이나 이와 비슷한 강력한 진통제 없이 고통 속에서 숨진다. 완화 치료를 필요로 하는 4,000만 명 가운데 14%만이 그 혜택을 본다.

이 보고서는 폐암 통증을 앓는 남자에 대한 한 의사의 설명으로 시작한다. 의사의 모르핀 처방을 받은 환자는 그 변화에 놀랐다. 그러나 다음 달이 되자 진료소에서는 완화치료용으로 쓸 모르핀이 바닥이 났다. 그 남자는 다음 주 로프를 가지고 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약을 얻을 수 없다면 진료소 창문으로 보이는 나무에 목매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의사는 “진심으로 들렸다”고 했다.

풍요로운 나라에서는 오피오이드 구입이 너무 쉬운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러나 국제마약통제위원회와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이 약을 구할 여건은 놀랄 만큼 불평등하다. 미국에서 유통되는 오피오이드(모르핀 효과를 내는 약물들)는 완화치료를 해야 하는 환자가 필요로 하는 양의 3배를 넘어선다. 앞서 목숨을 끊겠다고 한 환자가 있었던 인도에서 그 공급은 필요량의 4%에 불과하다. 나이지리아에서는 0.2%에 그친다. 부족한 처방으로 개도국 사람들이 고통 겪는 한편에서 미국인들은 과도한 처방을 걱정한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오피오이드를 구하기 어렵긴 하나 이것이 비용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속효성 특허만료 모르핀은 개당 몇 센트에 불과하다. 이런 의약품의 ‘필수 패키지’를 구하는 데는 중ㆍ저소득 국가에서 1인당 연간 약 0.78달러 정도 들 것으로 랜싯위원회는 추산한다. ‘고통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오피오이드를 제공하는 전체 비용은 최저 소매가로 연간 1억 4,400만 달러에 불과하다(오피오이드는 빈곤국에서 더 비싼 경향이 있다). 세계 보건 지출 전체로 볼 때 큰 부담이라고 할 수 없다.

통증완화는 공공정책에서 우선 순위가 아니어서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의학은 삶의 질보다 단지 사람들이 살아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둔다. 게다가 수개월 간 고통을 겪는 말기 환자들은 더 나은 치료를 요구할 상황이 아닌 경우가 많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오피오이드 공포증일 것이다. 오피오이드를 병원에서 이용하도록 할 경우 관련 중독과 범죄가 늘어날 것이라는 잘못된 두려움 때문에 사용이 제한된다. 의료인들이 필요할 때 이를 제공하는 훈련도 받지 못한다.

미국에서 보듯 오피오이드는 해롭고 중독성이 있지만 그 위험성만으로 의료적 사용을 극단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상되는 이익이 예상되는 위험보다 훨씬 클 때는 그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정당하다. WHO가 모르핀 및 기타 필수 완화약물에 대한 규제가 너무 엄격하다고 지적하는데도 개도국 정책결정자들은 이 방향을 선택하고 있다. 완화약물을 아예 또는 거의 구할 수 없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정당하지 않다.

과다 처방을 막고 암시장으로 약물이 흘러가지 않도록 하면서 모르핀을 구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까다롭긴 해도 불가능하지 않다. 랜싯위원회는 WHO, 대학연구원 및 비정부기구와 협력해 훈련 받은 자원봉사자 중심으로 완화치료를 시행하는 인도 케랄라주에 주목한다. 이곳에서는 과다 처방을 할 이유도, 오피오이드가 오용된 사례도 없다. 위원회에 따르면 눈 여겨 볼 또 다른 모델은 우간다이다. 이 나라에서는 비정부기구가 운영하는 호스피스를 통해 전국 공중보건시스템에 경구용 모르핀을 공급하고 있다.

플러머의 진통제 밀수는 분명히 어리석었다. 그녀의 이집트 감옥 경험은 개인적으로는 비극일 것이다. 그러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지나치게 엄격한 규제 때문에 합법적으로 트라마돌을 얻지 못하는 제도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플러머 사건이 드러내 주는 더 광범위한 불행에 주목해야 한다. 많은 개도국 시민들이 정부의 오피오이드 공포증 때문에 효과적인 완화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어리석기만 한 일이 아니다. 랜싯위원회의 표현을 빌리면 “의료, 공중보건과 도덕의 실패이자 정의에 대한 모독”이다.

피터 싱어 미국 프린스턴대 생명윤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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