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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분투기] 시시해도 괜찮아

입력
2016.12.22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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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부터 아이가 음악교실에서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내 아이는 아직 많이 서툴지만 이 클래스의 또래 아이들 중에는 탄성이 나올 만큼 잘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 아이들은 계이름도 잘 읽고, 노래도 잘하고, 피아노 연주도 선생님의 지도 속도를 넘어설 만큼 잘한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안다는 것은 이런 아이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연습하길래 저렇게 잘하는 것일까. 내 아이는 역시 평범하다. 조성진처럼 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게다가 아이에게 “정신차려”라며 겁박에 가까울 정도로 주의을 주지 않으면 노래를 부르다가도 딴청을 피우고, 노래를 감상한다. 한 사람씩 앞으로 나가 피아노 연주를 해야 하는 날에는 아빠인 내가 곤혹을 치르게 된다. 건반 앞에 앉지도 않으려 할 뿐 아니라 앉았다고 하더라도 잘하는 아이들에 비해서는 우스운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집에 돌아와 아이에게 맹훈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잘하는 아이들에 비해 자신감이 없다면 흥미가 떨어질 수도 있을 테니 억지로라도 연습을 시켜보기로 마음 먹었다. 아이는 매일 5곡을 정해 곡마다 10번씩 반복해서 연습했다.

다시 음악교실 개인 연주 시간이 돌아왔다. 한 사람씩 앞으로 나가 피아노에 앉아 짧은 곡을 친다. 이제 내 아이 차례다. 아이는 싫은 내색 없이 앞으로 나가더니 연습했던 곡을 능숙하게 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바로 그 순간 주변 아이 엄마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 아이도 평범한 아이가 아니다. 그 동안은 연습이 부족했을 뿐이다’

집에 돌아와 파트너에게 음악교실에서 아이가 잘해냈고, 그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고 하자 파트너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아이가 잘했는데 당신이 왜 기분이 좋아.” 그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연습을 그렇게 했는데 잘 하는 게 당연하지.” 파트너의 말은 내가 그 동안 가장 경계하려고 노력했던 것, 즉 아이를 나와 동일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나도 모르게 경쟁에서 이기는 즐거움에 중독되어 아이에게 협소한 자아상만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 치는 피아노 연주를 감상할 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파트너의 말은 아이가 좋은 연주가가 아니라 좋은 감상자일 수도 있을 가능성을 내가 간과했음을 알게 해줬다.

며칠 전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크리스마스 뮤지컬이 있었다. 중요한 배역은 유치원에서도 똑똑하기로 소문난 아이들이 맡았고, 그 아이들이 더 자주 무대에 서고, 더 많은 노래를 부르고, 더 많은 연기를 했다. 주인공이 사는 집에는 세 마리의 쥐가 살았는데, 배역으로 쥐를 맡은 세 명의 아이들은 발표회 내내 무대 위를 기어 다니며 한 마디 대사도 얻지 못했다. 내 아이는 주역이 아니었다. 그 때문일까, 뮤지컬을 보는 내내 즐겁기 보다 내심 초조했다.

그날 밤 자기 전에 들은 라디오에서 시인 김사인이 ‘시시한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시시한 것은 대단히 장한 일은 못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크게 해로운 짓도 하지 못하고, 또 사납거나 모질지도 못합니다. 겁도 많고, 잘 지구요, 만만합니다. 요즘 말로는 쉬운 상대라는 거지요. 끼니거리가 없을 만큼 가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돈 많고 힘 센 것도 아닌 것, 그런 것이 시시함의 뉘앙스입니다.” 어쩐지 시인의 말을 듣고 있으니 ‘시시한 것’도 꽤 괜찮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시덥잖은 글을 쓰는 나야말로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힘이 세지 않아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사나울 수도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겁이 많은 내 아이도 꽤나 근사하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내 아이는 철두철미하지는 않지만 뭔가 모를 시시함의 여유가 분명히 있다.

주역이 되는 것처럼 대단하지는 않더라도 ‘시시한’ 조역을 맡은 내 아이와 다수의 아이들은 모두 무대에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시시함을 긍정해줄 수 있는 어른다운 시선이 없었던 탓에 오직 나만 초조했을 뿐이다.

권영민 철학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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