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수현 기자

등록 : 2016.01.22 15:57
수정 : 2016.01.22 15:57

관념도 과장도 버렸다, 소소하게 읊은 세상 풍경

김광규 새 시집 ‘오른손이 아픈 날’

등록 : 2016.01.22 15:57
수정 : 2016.01.22 15:57

시집 '오른손이 아픈 날'을 낸 김광규 시인. 왕태석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오른손이 아픈 날

김광규 지음

문학과지성사 발행ㆍ146쪽ㆍ8,000원

심상한 시는 이단이다. 말틀, 생각틀, 틀이란 틀은 모조리 깨부수다 못해 깨는 행위마저 식상해 하는 시의 세계에선 심상함이야말로 유일하게 남은 금단의 영역일지 모른다.

김광규의 시는 지구를 한 바퀴 돈 뒤 집 안에서 발견한 파랑새처럼 평범하고 소소하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익히 알려진 그의 시 세계는, 슬플 때 울고 기쁠 때 웃는 범상함으로 읽는 이를 감정의 출발선으로 되돌려 놓는다.

올해로 시력 40주년을 맞은 시인이 열 한 번째 시집 ‘오른손이 아픈 날’(문학과지성사)을 냈다. “지금껏 시를 800편 정도 발표했는데 다 비슷합니다.(웃음) 변화가 없기론 제 삶이나 시나 매한가지예요. 문학은 일종의 진자운동입니다. 젊을 때 왼쪽으로, 나이 들어 오른쪽으로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난 중간에 멈춰서 조촘조촘 거린 셈이지요.”

이번 시집엔 시인이 2011년부터 2015년까지 4년 간 바라본 세상 풍경이 담겼다. 행만 바꿔 쓴 일기처럼 일상의 세목을 낱낱이 서술하는 방식은 여전하지만, 그 풍경은 이제 정년퇴직한 지 10년 된 노학자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해가 떨어질 무렵/ 방부목 산책로에서 넘어져 네 번째 요추를 다치고/ 8주 동안 허릿병 앓았다/ 겨우 걸을 수 있게 되어/ 넘어진 자리에 다시 와보니(…)일부러 넘어지기도 힘든 곳 아닌가/ 여느 때 같으면 툭툭 털고 일어나/ 태연히 동네로 내려갔을 이 자리에서/ 느닷없이 쓰러진 지 두 달 만에/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늙은이 혼자/ 조촘조촘 발걸음 옮기고 있다/ 긴 그림자 힘겹게 끌고/ 헌 집으로 돌아가는 길”(‘어제 넘어진 자리’ 일부)

아무 장애물도 없는 평지에서 어이없이 넘어진 노인이 어느새 너무 길어져 버린 그림자를 끌고 집으로 돌아간다. 늙어감의 비애를 비롯해 유난히 죽음에 대한 시가 많은 것은 그의 시가 철저히 현실 체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순수논리나 관념을 갖고 말하는 건 철학이죠. 간혹 시 심사자리에 불려나가곤 하는데 솔직히 말해 요즘 시집 열 권 중 다섯 권은 무슨 말인지 전혀 감을 못 잡겠습니다. 비평가들은 뭐라고 하나 봤더니 해설은 더 모르겠더라고요.(웃음) 의미 전달을 차단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아주 독특한 재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실험적인 시가 시단을 풍미하는 요즘 같은 때 제 시는 안티 테제가 된 셈이죠.”

어느덧 희귀광물이 돼버린 그 구체성 아래엔 시가 대중 곁에 내려 앉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인의 과감함이 있다. 머릿속에서 미친 듯이 가지를 뻗는 관념을 뎅강 잘라내고, 그럴듯한 문장 하나 남겨야 한다는 강박도 던져 버리고, 통속의 세계에 버티고 앉아 누구보다 깊고 신중하게 호흡한다.

“이 의자를 편리하게 뒤로 젖히고 앉아/ 두 다리 쭉 뻗어 낡은 와인 상자에 올려놓으면/ 책 읽기 편할 뿐만 아니라/ 창밖의 오동나무 바라보기도 좋다/ 넓은 나뭇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듣다가 문득/ 두 발 받쳐주는 와인 상자가 고마워/ 내심 ‘지족’이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알 知, 발 足, 두 글자를 합친 이 별명을/ 아직 아무도 모른다”(‘아무도 모르는 별명’ 일부)

“즐거움이든 슬픔이든 과장하는 타입은 못 됩니다. 그보다는 잠깐 지나가는 만족을 잡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원고료를 많이 받는 그런 큰 기쁨 말고, 발받침 하나가 주는 순간의 만족. 떠나는 지하철 안에 간신히 들어갔을 때의 기쁨. 요즘 그런 기쁨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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