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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미친 건 자랑이 아니야

입력
2018.05.08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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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한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한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때 그 사람들을 우리는 미친개라 불렀다. 학교, 군대에 꼭 한 명씩 있었다. 질서를 바로잡고 기강을 세우겠다며 인간 몽둥이를 자처한 사람들. 미친개로 불리는 걸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폭력을 휘두를 권한이 국가와 사회에서 나왔으므로. 맞지 않을 자유보다 똑바로 살 의무가 중요한 시절이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학교, 군대의 미친개는 다행히 개체 수가 급감했다.

2018년의 자칭 미친개들은 계급의 사다리 저 위쪽에 산다. 그들을 견디는 일은 계급의 문제가 됐다. 잘 나가는 콘텐츠 스타트업의 젊은 대표 A씨가 얼마 전 물러났다. 직원 불러 놓고 15분간 소리 지르기, 직원들 울리기, 회식에서 강제로 술 먹이기, 얼음 던져 직원 입술 터뜨리기, 룸살롱에 여직원 데려가 ‘여자’ 고르게 하고 옆에 앉히기… 전 직원이 고발한 A씨의 악행 목록이다. 그는 업계에서 미친개로 통했고, 그걸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미친개든 착한개든, 모든 걸 성과가 포장하고 힘이 허용하는 세상이니까.

A씨는 공포를 노렸다. 미친개가 무서운 건 상식과 이성으로 달랠 수 없어서다. “나 미쳤다, 어쩔래!” 그런 협박에 맞서 어쩔 수 있는 건 정말로 없다. 약자의 무기력한 공포는 강자의 자유가 된다. 갑질할 자유, 착취할 자유, 유린할 자유. A씨는 그 자유를 누렸다. 그는 사과문에서 “젊은 나이에 지위라는 것을 갖게 되다 보니 괴물이 되어버린 것 같다”고 후회했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갑질이 폭로됐을 때, 대한항공 직원들과 광고업계 인사들의 반응은 “드디어 터졌다”에 가까웠다. 조 전 전무가 직원들에게 했다는 막말 녹취록을 보면, 그도 ‘괴물의 자유’를 즐긴 것 같다. “또 뒤에 가서 내 욕 진탕 하겠지? 그렇죠? 억울해 죽겠죠?” 그는 차곡차곡 다져진 자신의 악명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신 월급에서 까요! 그러면 월급에서 까! 징계해! 나 이거 가만히 못 놔둬!” 아무리 억울해도 입 닫고 마는 것이 월급과 승진에 목매단 을의 속성이라는 것도 꿰뚫고 있었다. 광기 서린 폭언이 한 번의 실수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가진 자의 미움받을 용기가 탱천하면 그렇게 무서운 무기가 된다.

오늘날의 미칠 자유가 계급적 특권이라는 사실은 쓰라린 비극이다. “이 구역의 미친X은 나야.” 미국 드라마 ‘가십걸’의 유명한 대사다. 뉴욕 최고 상류층 가문의 싸가지 없는 10대 소녀가 그렇게 뇌까리는 건 쿨함의 상징이다. “더러운 꼴 보기 싫으면 퇴근 후 카톡으로 업무 지시하지 마세요. 앞으로 회식 2차엔 절대로 참석하지 않겠어요. 나는 단단히 미쳤거든요.” 가지지 못한 자의 그런 말은 쿨함도, 패기도 아니다. 생계 포기 선언이다. 당장 병원에 갈 일은 없겠으나, 사원증을 반납하고 집에는 가야 할 것이다.

당당하게 미치려면 최소한 영세 업체 대표는 돼야 한다. “사장님이 미쳤어요”는 마케팅 전략이지만, “알바생이 미쳤어요”는 웃음거리다. “왜 우리 세대처럼 미친 듯이 열심히 하지 않니?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니?” 미친 척 마음대로 행동할 자유는 없으면서 ‘미친 것에 준하는’ 열정을 강요받는 것은 젊은 세대가 겪는 부조리다.

초고속 경제 성장이 지상 과제인 동안은 미치는 것이 미덕이었다. 속도와 효율성의 이름으로 많은 것이 용서됐다. 미친개들은 그런 분위기를 믿고 설쳤다. 이제 다른 세상이다. “미칠 듯 사랑했던 기억이 그 추억이 너를 찾고 있지만~ 더 이상 사랑이란 변명에 너를 가둘 수 없어~”(김범수 ‘보고 싶다’) 노래 속 화자의 한때 미친 사랑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은 건 그가 정신을 차린 덕분이다. 가사를 바꿔 불러 볼 것을 교만한 갑들에게 권한다. “미칠 듯 갑질했던 기억이 그 추억이 을을 찾고 있지만~ 더 이상 열정이란 변명에 너를 가둘 순 없어~”

최문선 문화부 차장

최문선 문화부 차장
최문선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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