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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산다는 건, 나만의 사전을 쓰는 일

입력
2018.04.10 15:26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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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적부터 국어사전을 좋아했다. 페이지를 넘기면 베일 것만 같은 얇고 빳빳한 종이의 감촉이, 사전이 손때 묻어 낡으면 그 퀴퀴한 종이 냄새마저 좋았다. 사전을 갖고 놀기도 했다. 친구들과 단어 빨리 찾기 놀이를 했다. 지금 그 소싯적 실력이 유용한 단 한 곳은 노래방뿐이다. 아무 페이지나 닥치는 대로 펼치고 낱말 유람을 떠나는 버릇도 있었다. 고은 시인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국어사전을 한 페이지씩 씹어 먹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언어에 배고픈 거지다”고 토로한 걸 읽은 적이 있다.

기자를 할 때는 새동아국어사전인가, 엣센스 국어사전인가를 늘 곁에 두었다. 맞춤법이 긴가민가할 때는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병적인 버릇이 있었다. 이제는 원고지가 아닌 모니터에, 펜이 아닌 자판으로 글을 쓰는 세상이 됐다. 컴퓨터가 알아서 틀린 글자에 빨간 줄을 쳐 주고 띄어쓰기까지 척척 고쳐 주는 세상이 왔으니 국어사전 출판사는 망했으려나.

그래도 나는 표준국어대사전과 맞춤법 앱을 휴대폰에 깔아놓고 있다. 한글맞춤법도 바뀌다 보니 자신이 없을 때는 국립국어원이 운영하는 카톡 플러스친구 ‘우리말365’에 묻는다. 몇 분 안에 친절한 대답이 와서 참 좋다. 학교에서 강의할 때는 구닥다리 선생처럼 맞춤법 시험까지 보게 했다.

어휘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휴대폰에는 유의어 사전 앱도 깔려 있다. 어떤 단어가 식상하게 느껴지거나 정이 안 갈 때는 마음에 드는 낱말을 찾을 때까지 헤맨다. 지금도 모르는 단어를 만나면 꼭 찾아보고 나만의 은밀한 보따리에 쌓아둔다. 최근에 ‘숨비소리’라는 우리말을 뒤늦게 알고는 기뻤다.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발간한 시집 이름에서 봤다. 해녀들이 물질을 하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물 밖으로 나오면서 내뿜는 휘파람 소리라고 한다. 검색을 해 보니 횟집 이름으로도 많이 쓰였던데 나의 무식함이라니.

서론이 좀 길었다. 며칠 전 우연히 접한 어떤 책의 서문을 접하고 단어와 의미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산다는 건 나만의 사전을 쓰는 일이다.” 화들짝 놀랐는데 문장은 또 이렇게 이어졌다. “그리고 자신만의 사전을 거듭 수정하는 일이다.”

아, 그래 맞아. 바로 그거였어. 이 짧은 글 안에도 틀린 게 있을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단어의 사전적 정의와 적확한 쓰임새와 맞춤법과 비문(非文)에 유난을 떠는 나의 엄숙주의를 죽비로 내려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사전적 언어의 세계에 갇혀 살아온 거였다. 어휘에 대한 나의 태도는 고루했고 내 인식은 편협했구나. 내 언어는 내 것이 아니었구나. 나를 떠나서 부유했구나. 내 언어는 내 삶의 감촉이 아닌, 죽은 기표(記標)에 불과했구나. 마이 딕셔너리가 아니라 오피셜 매뉴얼이었구나. 말은 말로서 존재하지만 그 의미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시대마다 다르고 변해간다는 것. 말들과의 관계는 결국 나의 내면과, 타인과, 세상과의 관계라는 것. 그래서 산다는 것은 내 사전을 채워 가면서 끊임없이 퇴고해 가는 것. 사전적 정의가 아니라 산문적 정의를 내려야 한다는 것.

얼어붙은 내 언어 바다의 쇄빙선이 된 책은 이제 막 서점에 깔린 칼럼니스트 이윤정이 쓴 ‘그 여자의 공감 사전’이다. 이 책을 펼치는 사람은 마치 비밀을 들킨 듯 킥킥거리며 공감할 것이 분명하다. 정통 국어 실력 향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그저 그가 50을 갓 넘긴 세월을 살아오며 부대낀 언어들의 비공식적 정의를 오물오물 씹어보면 된다. 참고로 김소연 시인의 ‘마음사전’(2008년)과 그 후속작 격인 ‘한 글자 사전’(2월 출간)까지 읽어본다면 당신의 사전은 감성과 직관과 사유와 성찰의 화수분이 될 터이다.

한기봉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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