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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시절로 퇴행”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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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시절로 퇴행”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

입력
2016.10.1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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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대, 서울연극협회, 한국작가회의 주최로 지난해 9월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검열 반대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문화예술 검열 중단” “예술위 위원장 사퇴”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문화연대 제공
문화연대, 서울연극협회, 한국작가회의 주최로 지난해 9월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검열 반대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문화예술 검열 중단” “예술위 위원장 사퇴”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문화연대 제공

‘블랙리스트’는 지난해 문화예술계의 가장 큰 이슈였다. 겉으로 드러난 증상은 각종 문화예술 지원 사업들에 대한 심사 지연이다. 일주일이면 끝날 심사가 한 달 넘게 걸린다는 불만이 나오면서 “큰 작품일수록 참여자가 많을 수 밖에 없는데, 그 많은 사람들 이름을 블랙리스트와 일일이 대조해보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냐”는 비아냥이 나돌았다. 각종 공모나 심사의 매 단계마다 공무원들이 너무 간섭해대는 통에 힘없는 산하 기관이나 단체의 실무자들이 중간에 끼어 죽을 고생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런 정황은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0일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회의록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당시 권영빈 문화예술위원장은 회의록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기금 지원)책임심의위원을 선정해놓고 보니까 여러 가지 문제 중에 지원해줄 수 없도록 판단되는 리스트가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을 안 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직원들이 굉장히 곤욕을 겪고 있습니다.” 권 위원장은 이런 발언도 했다. “또 하나는…. 참 말씀을 드리기가 힘든데요. 심의를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자율적인 심의가 원만하지 않다.” ‘지원해줄 수 없도록 판단되는 리스트’라는 표현은 사실상 블랙리스트에 다름 아니다. 위원 선정, 심의 과정 등이 모두 블랙리스트에 의해 좌우된다는 얘기다.

또 지난해 11월 6일 문화예술위 회의록에는 아예 심사위원 추천 문제를 논의하다 “결국 그 분도 청와대에서 배제한다는 얘기로 해서 심사에 빠졌습니다”는 한 위원의 발언도 있었다. 청와대의 입김이 곳곳에 미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게 도 의원의 주장이었다. 도 의원은 11일에도 CBS 김현정의 뉴스쇼와 인터뷰에서 “어떤 작가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포기를 종용하고, 심사위원들에게 재심사해 달라 하고, 발표를 두 달씩 미루고, 그러다가 안 된다고 하니까 문예위 직원들이 직접 작가를 만나서 포기를 종용하고, 그러고는 포기서를 자기들이 컴퓨터에 들어가서 제출해서 나중에 징계 받은 적이 있다”며 “왜 이렇게 집요하게 이런 식으로 운영할까라고 봤더니 어떤 기관에서 된다, 안 된다라고 하는 명단이 있고 그 명단, 리스트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해서 불이익을 준다더라”고 말했다. 그는 “그 기관이 어떤 기관이냐”는 질문에 “어떤 기관이냐고 물어보니까 제대로 답변을 안 하는데 어떤 문건에 보면 청와대”라고 나온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5월 청와대가 9,473명의 예술인 이름이 담긴 블랙리스트를 문체부에 내려 보냈다는 증언은 그간 문화예술계의 이런 주장과 소문들을 뒷받침한다. 눈길 끄는 건 이 문건이 ‘반정부적’이라 딱지를 붙일만한 문화예술인을 추출해내는 방식이다. 다른 분야에 비해 진보 성향이 강한 문화예술인들은 이명박ㆍ박근혜 정권 내내 정부를 비판하고, 이런 저런 반정부 서명운동을 벌여왔다. 국정교과서 반대 선언, 공공부문 파업지지 선언, 4대강 사업 반대 선언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 고른 키워드가 ‘세월호’ ‘문재인’ ‘박원순’인 것이다.

파다하게 떠돌던 소문을 확인해주는 자료가 있다는 말에 문화예술계는 놀라기보다 참담하고 딱하다는 반응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작품 ‘개구리’를 무대에 올렸다는 이유로 공모전 참여 포기를 요구 받았던 박근형 연출가는 “워낙 어처구니 없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라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이라고 예상은 했다”며 전화를 끊었다. 연극계 다른 관계자는 “블랙리스트가 실제 존재하고, 리스트의 실물을 봤다는 사람도 있으며, 어떤 산하단체장은 명단이 방대하다 보니 아예 책상 밑 유리판에다 블랙리스트를 깔아두고 틈틈이 봐가며 일했다는 얘기까지 있었다”면서 “솔직히 현 정부가 그런 성향이기 때문에 ‘그럼 그렇지’ 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3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전시에 작품이 걸리지 못해 논란에 휩싸였던 작가 임옥상씨는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일이 대명천지에서 일어나고 있다. 미친 짓이다”고 분개하면서도 “결국 문화예술인들이 어떻게 보면 저들의 큰 구도 속에서 철저하게 개별화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자본이 문화예술시장에 관심이 없어지고 정부 눈치만 보면서 결국은 국가가 문화예술의 물주가 돼버리니 관료의 힘만 커진다”는 것이다. 2014년 광주비엔날레 당시 ‘세월오월’ 작품이 전시되지 못했던 작가 홍성담씨는 “내가 풍자화를 그리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내가 좀 미남인데 예쁘게 좀 그리라’고 농담했다는데 박근혜정부는 풍자화라면 치를 떤다”면서 “창조경제를 그렇게 하고 싶으면 관용부터 배우라는 말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연 남산예술센터 극장장은 “영국 국립극단은 토니 블레어 총리와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전에 대해 막말하는 내용을 작품으로 올려도 견제나 비판은커녕 해외 공연 투어 지원까지 받을뿐더러 예술인도 한 명의 시민으로서 정치적 지지 의사를 자유롭게 내놓을 수 있다”면서 “그런 행위가 탄압의 빌미가 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고 개탄했다. 한국작가회의 최원식 이사장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드문 나라로 칭송되던 대한민국을 옛 군사독재 시절로 퇴행시키는 노릇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며 “작가회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어떠한 블랙리스트에도 반대한다”고 말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변해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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