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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길 위의 이야기] 맥주 한 병

입력
2017.02.1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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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오전에 짧은 미팅이 있어 나갔다가 진이 다 빠져 버렸다. 상대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쫑긋쫑긋, 또 내 할 말 하느라 바쁘다 보니 에너지가 몽땅 동나 버렸다. 가방을 챙겨 나오면서 세 시간은 족히 걸린 것 같다 생각했는데 시계를 보니 두 시간도 안 되었다. 아침도 안 먹은 속이 헛헛해 눈에 보이는 대로 베트남 식당엘 들어갔다. 차돌쌀국수 하나를 시켜 고수 잎을 잔뜩 넣었다. 그리 맛있는 국수집이 아니어서 훌훌 들이켠 국물에서는 비누냄새 같은 것이 풍겼다. 문득 맥주 한 병 마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낮부터 혼자 앉은 식당에서 좀 우습지 않나 싶기도 했지만 말이다. 스무 살 때였다. 첫사랑을 여태 드문드문 만나고 있었던 여름, 우리는 피자를 먹고 있었다. 콜라 한 잔 쭉쭉 빨고 있는 내 앞에서 그 애가 생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술을 주문하는 그 애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덥잖아. 더울 땐 차가운 생맥주 한잔이 그만이지.” 갑자기 그 애가 다 자란 어른인 것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생경했다. 그 애가 말을 이었다. 약간 무르춤한 표정을 하고서였다. “그런 남자가 되고 싶다고. 더울 때 생맥주 한잔으로 시원하다, 말할 수 있는 그런 남자.” 그러니까 그 애에게도 아직 생맥주는 쓰고, 낯설고, 배부르기만 한, 그저 차가운 물 같은 거였던 거다. 아직 자라려면 한참이 남은 소년이었지. 나도 아직 친구들과 우르르 떠들면서 마셔야 맥주가 맛있다. 이 나이가 되면 일 끝내고 소파에 혼자 앉아 맥주 한잔 하며 아, 시원해, 할 줄 알았는데 아직 덜 자란 모양이다. 그래도 기어이 베트남산 맥주 한 병 마셨다. 맥주 때문에 배가 불러 국수는 남겼지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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