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박세진
패션 칼럼니스트

등록 : 2017.11.01 04:40

[박세진의 입기, 읽기] 美영화계 덮친 성추문.. 패션계도 남일 같지 않네

등록 : 2017.11.01 04:40

지난 9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돌체&가바나의 2018/19 SS 컬렉션. AP 연합뉴스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문 사건이 영화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은 패션계와의 많은 관련도 드러나고 있다.

영화계와 패션계 사이에는 언제나 그랬듯 연결 고리가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트리시 고프나 카라 델레바인 같은 모델은 영화계 진출을 모색하던 즈음 와인스틴에게 성희롱을 당한 사실을 얼마 전 폭로했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와인스틴이 인기 TV 프로그램 ‘프로젝트 런웨이’를 모델들과의 만남을 위해 써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많은 패션 잡지를 발행하는 콘데 나스트사의 아트 디렉터인 안나 윈투어도 이번 이슈에 대해 며칠 간 침묵하다 그런 행위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도나 카란은 아프리카의 여성들을 생각하라면서 이런 사건은 당사자들이 자초한 일이라는 식으로 와인스틴을 옹호했다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이후 그를 두둔하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패션계 내부의 문제도 있다. 신인 모델로 출발해 주요 브랜드의 광고 모델과 패션지 커버 모델에 이어 다음 커리어로 성장해 가며 캐스팅 디렉터, 사진작가, 디자이너, 광고업체 등과 일하는 패션계는 영화계와 비슷한 점이 많다.

와인스틴을 옹호하는 카란의 인터뷰를 실은 한 매체는 패션계에는 성추행 같은 문제가 없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으면서 남성 광고 담당자들과만 인터뷰를 해 비난을 자초했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하나 같이 그런 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많은 이들이 본인의 경험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크리스티 털링턴은 모델 시절 성범죄자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던 경험을 이야기했고, 역시 모델이었던 카메론 러셀은 패션계에서도 많은 모델들이 성추행을 당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최근 인권 운동을 하고 있는 러셀은 비슷한 사건을 겪은 모델의 사례를 모으고 무기명으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사실 패션계는 이런 사건에 대해 그렇게 기민하고 단호하지 못했다. 사진작가인 테리 리처드슨의 성추문 사건이 2014년에 폭로됐는데, 2001년과 2007년, 2011년에도 그가 비슷한 성희롱을 했다는 게 드러났다. 이후 리처드슨과 더 이상 작업을 하지 않은 몇몇 잡지와 브랜드가 있긴 했지만, 그는 빠른 속도로 업계에 복귀했다. 최근에는 발렌티노의 캠페인 광고 사진을 찍었고, 내년 1월까지 잡지 표지 작업 스케줄도 이미 잡혀있다.

와인스틴 문제가 터지고 나서야 리처드슨은 왜 계속 일하고 있는지를 다룬 기사가 몇 개 나왔고 결국 유수의 잡지사들과 브랜드가 그와 작업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내놓았다. 발렌티노는 이번 시즌엔 크레딧에서 그의 이름만 빼기로 했고 앞으로는 작업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미국 뉴욕에서 지난 9월 열린 패션위크에서 모델들이 마르케사 2018 SS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보다 큰 움직임도 있다. 모델이었던 세라 지프는 2012년 모델협회를 결성해 모델 근로 계약과 처우 문제 등을 개선하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사실 모델들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계약과 비지니스 관계 속에서 일반 근로자들보다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처지다.

최근 사건 이후 모델협회는 새로운 법안을 미국 뉴욕시에 제출했는데, 이 법안이 통과되면 모델에 대한 법적 보호가 확대된다. 또 디자이너와 사진 작가 등은 권력을 남용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통지를 받게 된다. 지금까지는 모델이 일하는 과정에서 성희롱이 발생했을 때 최종 법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도 명확하게 규정돼 있지 않았다.

뉴욕타임스의 에이미 라로카가 말했듯, 패션업계는 여성을 위한 천국 같은 곳은 아닐지라도 많은 여성이 성공할 수 있었던 터전이다. 모델 에디 캠벨의 말처럼 이 문제는 사진작가 한 명을 퇴출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또한 사진작가와 모델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문제도 아니고, 미국과 유럽의 패션계에만 있는 일도 아니다.

패션계는 위계에 의한 성폭력 문제에 있어 우유부단한 태도를 이미 보여 줬고, 침묵이라는 오랜 관행을 이제 깨 보려고 하고 있다. ‘앞서 나가는’ 패션의 이미지답게 이런 문제에서도 모범이 되고 새로운 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며 힘을 실어 줄 때다.

패션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일보 페이스북

한국일보 트위터

한국일보닷컴 전체기사 RSS

RSS

한국일보닷컴 모바일 앱 다운받기

앱스토어구글스토어

한국일보닷컴 서비스 전체보기

Go

뉴스 NOW

이전

  • 종합
  • 정치
  • 사회
  • 경제
  • 국제
  • 문화
  • 연예
  • 라이프
  • 스포츠

다음

액상화로 고층 건물 타격받나.. 포항 액상화 현상에 우려 증폭
암암리 판매되는 먹는 낙태약 ‘미프진’… 더 커지는 찬반 논란
“너희들만 왜”기다림에서 이별을 고하는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
국립극장ㆍ남대문시장 ‘석면 경보’… 환경부, 석면 건축물 2만4,868개 공개
현빈 “관객을 어떻게 잘 속일까 그 생각만 했죠”
월드컵 대회 1071일 만에... 쇼트트랙 남자 계주 금빛 질주
내 독서 취향 분석하는 똑똑한 ‘집사’ ‘마법사’... 서점가 큐레이션 열풍

오늘의 사진

많이 본 뉴스

  • 1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