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논설위원

등록 : 2016.03.26 10:00
수정 : 2016.03.27 13:54

‘미생’의 동네 지나면 아슬아슬한 절벽마을이…

강북을 걷다(8) 서울 종로구 창신동

등록 : 2016.03.26 10:00
수정 : 2016.03.27 13:54

전태일 숨결 그대로 서민내음 물씬한 골목은 봉제메카

백남준 김광석 등 ‘예술’이 자란 곳… 도시재생은 숙제

인왕산과 마주보며 서울 강북의 동쪽 경계를 이루는 산이 낙산이다. 높이가 125m에 불과하고 나무와 숲이 적어 산의 위용은 떨어지지만, 한국전쟁과 도시화 이후 많은 사람이 터를 잡고 살아온 친근한 동네다. 그 중 흥인지문 옆 창신동은 서울성곽 바깥의 첫 마을이다. 흔히 ‘봉제의 메카’로 부르는 바로 그 곳. 그러나 그런 표현만으로는 창신동을 다 담아낼 수 없다. 서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경과 분위기가 창신동에 있기 때문이다.

●재봉틀 소리와 오토바이 소리

지하철 동대문역 1~3번 출구로 나와 작은 길로 들어서면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간듯한 착각에 빠진다. 허름한 옛집, 오래된 가게, 옛날식 간판, 엉킨 전깃줄. 멋 부리기 경쟁이라도 하듯 치장에 열을 내는 신생 아파트 촌과 달리 낡기는 했어도 포근하고 정이 가는 동네다.

1번 출구에서 5분 정도 걸어 도착한 전태일 재단에는 창신동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며 1970년 11월 13일 인근 평화시장에서 자신의 몸을 불태웠다. 하루 열 다섯 시간 일하던 어린 소녀들을 떠올리며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쳤다. 재단이 있는 건물 2층에는 전태일 사진과 관련 자료들이 있다. 전태일이 웹툰 ‘미생’의 장그래와 어깨동무를 한 조형물도 눈에 띈다. 분신한 지 46년이 된 전태일이지만 이곳에서는 여전히 살아있는 듯 하다.

전태일 재단 2층의 벽면에 붙어있는 전태일과 동료들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전태일이다.

전태일 재단에 청년 전태일과 '미생'의 장그래가 어깨동무를 한 조형물이 서있다.

재단과 가까운 골목에는 봉제박물관이 세워진다. 2017년 완공 예정인 3층 규모의 아담한 공간이다. 바로 앞 길 바닥에는 봉제거리박물관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봉제박물관도 박물관이지만 바로 이 거리 자체가 살아있는 박물관이라는 뜻이다. 표지판이 있는 골목에는 봉제 용어를 설명하고 봉제 공장의 24시간을 알려주는 안내판들이 있다.

자료에 따라 차이가 크지만 창신동에는 봉제 공장 수천 개가 있다. 봉제 일을 하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많다. 이런 수치가 아니더라도 이 동네에서는 “드르륵 드르륵” 재봉틀 소리와, 원단 및 완제품을 나르는 “부릉 부릉” 오토바이 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들린다. 재봉틀 소리로 시작해 오토바이 소리로 하루가 끝난다. 공장이라야 가정집, 가게, 지하실 등에 재봉틀 몇 대 들인 가내수공업 형태의 사업장이다. 재봉틀 소리가 없다면 집인지 상점인지 공장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다.

창신동이 봉제 마을이 된 것은 1970년대다. 평화시장 등 동대문 상가의 임대료가 오르자 상가에 함께 있던 공장들이 가까운 창신동으로 옮겨온 것이다. 창신동 봉제 기술자들은 솜씨가 뛰어나고 손도 빨라 주문이 들어오면 사흘 안에, 심지어 세 시간 만에도 옷을 만든다. 동대문 패션이 이들의 손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봉제거리박물관 안내판. 이 거리 자체가 살아있는 봉제박물관이라는 뜻이다.

봉제거리에 세워진 의류생산 공정 안내판

● 채석장 절개지 위의 아슬아슬한 주택

창신2동 주민센터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좁은 골목을 따라가면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는 어마어마한 풍경이 나타난다. 채석장으로 쓰던 바위 절개지와 그 위의 주택들이다. 창신동 낙산 줄기는 암석의 품질이 좋아 일제시대부터 채석장으로 사용됐었다. 암석의 품질은 전북 익산 황등산이 최고고, 낙산과 포천의 화강암이 그 다음이라고 한다. 일제 때 경성부가 직영 채석장으로 사용한 이곳에서는 다이너마이트 발파와, 돌덩이 재단작업이 쉬지 않고 이뤄졌다. 옛 서울역, 한국은행 본점, 옛 서울시청, 조선총독부 건물이 창신동 화강암으로 지어졌다. 채석장은 1960년대 후반까지 사용됐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로 밀려온 사람들이 폐쇄된 채석장 자리에 눌러앉아 지금과 같은 서민 주거지를 만들었다. 깎아지른 낭떠러지와 그 위의 아슬아슬한 주택을 절벽 마을이라 부르기도 한다. 떼어낸 돌덩이를 규격에 맞춰 자르던 절벽 아래에도 마을이 있다. 큰 바위 사이의 좁은 공간에 들어섰기 때문인지 좁고 좌우비례가 맞지 않는 집들도 있다.

채석장으로 쓰던 바위 위에 집들이 들어서있다. 이곳에서 떼어낸 돌덩이들은 일제시대 때 서울역, 서울시청, 조선총독부 등을 짓는데 사용됐다.

채석장 절개지 바로 아래에 들어선 마을. 돌산 밑 마을이라고 부른다.

채석장 절개지 위의 집. 밑에서 올려다 보면 아슬아슬하게 보인다.

채석장 절개지 아래 좁은 틈에 들어선 집

굽이굽이 휘감아 도는 회오리길. 경사가 심하고 곡선으로 휘는 곳이 많아 위험해 보이지만 오토바이들은 요령껏 잘 다닌다.

채석장을 폐쇄한 지도 어느덧 50년이다. 돌을 깨다가 방치했으니 절개지가 예뻐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절개지를 어찌할지를 놓고 아이디어를 모으는 중이다. 그 중 하나가 암벽등반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도심과 가깝고 암질이 좋으니 검토해볼 만한 것 같다. 인물을 조각하자는 의견도 있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이브러햄 링컨 등 대통령 4명의 얼굴을 크게 새긴 미국 러시모어산처럼 이곳 암석에 대형 인물 조각을 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한다면 누구 얼굴을 조각해야 할까. 아이디어는 좋으나 자칫 분란이 날 수 있을 것 같다.

●박수근, 백남준 그리고 김광석

지금의 창신동은 다가구주택이 빽빽한 서민 주거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에는 저택과 별장이 많았다. 고리대금업으로 큰 돈을 번 임종상, 한일은행 설립자 조병택, 한국 최초의 재벌 백낙승 등이 도심과 가깝고 경치 좋은 창신동에 큰 집을 두었다. 철종 부마 박영효는 이웃 숭인동에 3,000평 저택이 있었다.

백낙승의 3남2녀 중 막내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은 창신동 3,000평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99간 한옥이었는데 지금은 다가구주택들로 쪼개져있고 한옥은 딱 한 채가 있다. 음식점으로 쓰던 이 개량 한옥은 7월에 백남준 기념관으로 다시 문을 연다.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이 태어난 곳. 이 일대가 전부 그의 집이었다. 7월 중 백남준 기념관으로 문을 연다.

화가 박수근(1914~1965)이 살았던 집은 큰 길 건너 완구ㆍ문구 상가가 많은 번잡한 곳에 있다. 안내 표지판이 없어 혼자서는 찾기가 어렵다. 강원 양구 출신인 박수근이 한국전쟁 때 서울로 내려와 미군 초상화를 그리며 모은 돈으로 장만한 개량 한옥이다. 그는 1963년 전농동 양옥으로 이사할 때까지 10년 이상 이곳에서 살면서 ‘빨래터’ ‘시장의 사람들’ 같은 작품을 그렸다. 당시의 단란했던 한 때를 장녀 인숙씨는 이렇게 표현했었다. “저녁이면 아버지가 집 마루에 앉아 하모니카로 ‘뻐꾸기 왈츠’를 불면 어머니가 노래하고 우리는 손뼉 치던, 행복한 기억이 있다.”

이들보다 늦게 대구에서 태어난 가수 김광석(1964~1996)도 창신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창신시장과 안양암의 중간에 있는 집에서 결혼 전까지 살았다. 얼마 전에는 그 집이 매각됐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다. 이 집도 주소만 갖고는 찾기가 어렵다.

가수 배호(1942~1971)도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고 춘천 출신의 작가 김유정(1908~1937) 또한 창신동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드라마 '시크릿가든'에서 주인공 길라임(하지원)이 살던 집도 창신동에 있다. 드라마 방영 때와 마찬가지로 길라임의 방 유리창에 아직 초록색 테이프가 붙어있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이제훈)과 납득이(조정석)가 이야기를 하던 골목.

드라마 '미생'을 촬영한 골목.

●당고갯길 너머 소박한 사찰 안양암

창신동에는 빨간 깃발이 날리는 점집이 많다. 하지만 옛날 보다 많이 줄어든 것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만 해도 낙산 산신령이 도와서인지 점괘가 90% 이상 맞았고 그 때문에 점술가가 몰려 순조 때는 그 수가 2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등을 짓는다며 바위를 깨고 산을 파헤쳐 산신령이 떠나는 바람에 점괘가 맞지 않았고 그 때문에 점술가들이 미아리 고개 등으로 흩어졌다고 마을해설사인 문무현(73)씨는 설명한다. 창신시장과 안양암을 잇는 작은 길을 당고개라 부르는데 이 역시 근처에 도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고갯길로 오토바이가 지나고 있다. 좁고 가파른 창신동 골목에서는 기동성 있는 오토바이가 가장 좋은 운송수단이다.

안양암은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작고 소박한 사찰이다. 1889년에 창건됐으니 역사가 짧다. 조선 후기 전각과 불화, 불상이 보존돼 있어 사찰 전체가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돼있다. 한 때 김광석의 추모 제사도 이곳에서 지냈다. 안양암은 왼쪽으로 거대한 암반이 이어져있다. 작은 주택과 골목 때문에 사라진 창신동의 본 모습이 이렇게 큰 바위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창신동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안양암. 뒤로 거대한 바위가 뻗어있다.

창신시장에서 안양암으로 가는 골목 중간에 있는 폐가. 주인이 미국으로 가면서 방치한 집으로 동네 사람들은 '미스터리 빈 집'이라고 부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신이라도 나올 듯한 흉측한 모습이었다.

●창신동 화두는 재생

창신동은 2007년 이웃 숭인동과 함께 뉴타운 지역으로 지정됐다. 뉴타운에 대한 맹목적 환상이 지배하던 때였다. 그러나 뉴타운의 맹점이 드러나 2013년 해제됐고 이듬해에 도시재생선도지역으로 지정됐다. 그런 만큼 지금 창신동의 화두는 재생이다. 새 것을 짓겠다며 있는 것을 없애기보다 낡은 것을 고쳐 다시 쓰자는 것이다. 그 뜻에 맞춰 마을 정체성 찾기와 공동체 활동이 활발하다. 도서관, 전시관, 방송국, 문화예술공간이 태어났고 사회적 기업도 생겼다. 창신동 골목을 걷다 보면 그런 공간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온다.

주민의 소통 공간이자 지역 재생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는 창신소통공작소.

미술가 임옥상이 창신소통공작소 옆에 세운 설치작품 '천개의 바람'.

[따뜻한 봄날, 서울 거리를 걷는 건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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