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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인간 어둠의 심연 파고든 ‘언어 도착자’의 건조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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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인간 어둠의 심연 파고든 ‘언어 도착자’의 건조한 문장

입력
2018.01.18 17:17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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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글 쓰며 소설 8권만 출판

1989년 美 포크너상 수상 작품

한국선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고

오바마는 휴가 때 즐겨 읽어

“삶이라는 터질 듯한 혼돈을 누구도 설터처럼 그려내지 못한다.” 미국 작가 제임스 설터가 받은 찬사다. 마음산책 제공
“삶이라는 터질 듯한 혼돈을 누구도 설터처럼 그려내지 못한다.” 미국 작가 제임스 설터가 받은 찬사다. 마음산책 제공

아메리칸 급행열차

제임스 설터 지음ㆍ서창렬 옮김

마음산책 발행ㆍ251쪽ㆍ1만3,000원

“마지막 시간이 찾아들 때 끝내 누워 죽지 않으려는 동물들이 있다. 노인은 그와 같았다.” 노인은 끝내 고독사한다. 세상 모든 고독의 시간, 새벽 3시에. “유품은 거의 없었다. 모든 것이 생기 없고 칙칙해 보였다. 망치의 손잡이는 반질반질했다…” 건조한 문장 몇 줄 안에서 노인의 삶이 압축됐다 확장된다.(단편 ‘흙’) 미국 작가 제임스 설터(1925~2015)가 소설을 쓴 방식이다.

한국전쟁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한 작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휴가지에 들고 간 책을 쓴 작가. 작가들의 작가. 한국 독자가 설터를 부르는 방식이다. “비비고 문지르기 좋아하는 ‘접촉 도착자’처럼 단어를 손에 넣고 비비고 이리저리 돌리고 느껴보며 단어가 정말 최상의 단어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을 좋아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는 설터는 자기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를 과연 흡족해할까.

설터는 전역해 작가로 산 60년간 장편소설 6편, 단편집 2편을 냈다. ‘언어 도착자’였으니 과작인 게 당연했고, 한동안 시나리오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의 첫 번째 단편집 ‘아메리간 급행열차’가 나왔다. 미국 발간은 1988년, 설터가 63세 때였다. 설터는 애욕, 위선, 수치, 시기, 배신, 죽음 같은 인간 어둠의 심연을 태연하게 파고든다. 통쾌한 권선징악, 선명한 기승전결은 없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바뀌는, 뚝뚝 끊길 듯 이어지는 장면을 따라가느라 에너지가 많이 든다. 그 만큼 많은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단편집에 실린 11편 중 설터가 가장 좋아했다는 ‘아메리칸 급행열차’에선 너무 빨리 찌들어버린 젊은 변호사 둘이 타락으로 질주한다. 둘은 이탈리아 여행 중에 만난 “새가, 금방이라도 날아가버릴 것 같은 새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것 같은 얼굴”의 여학생을 유혹하고, 여학생을 “나누어 가진다.” 둘은 타락하지만 추락하진 않는다. 세상의 주류가 대체로 그러하듯이.

‘20분’은 낙마 사고로 크게 다친 주인공이 죽는 데 걸린 시간, 설터가 그의 인생을 압축해 보여준 시간이다. “삶은 우리를 때려 눕히고 우린 다시 일어나는 거야. 그게 전부야.” 희망의 계시로 임한 아버지의 말은 실현되지 않는다. 슈퍼맨은 나타나지 않는다. 삶은 영화와 다르다. 설터의 단편들 속 인물들은 지질지질할 뿐, 절대 악인은 없다. 한 겹 껍데기 벗기면 너도나도 그렇고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설터는 환기한다.

제임스 설터 소설의 표지는 이번에도 던커 한나의 그림이다.
제임스 설터 소설의 표지는 이번에도 던커 한나의 그림이다.

원작의 표제작은 ‘황혼’이다. “폭풍우를 헤치며 살아온 멋진 여자였지만 지금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46세 이혼녀의 권태로운 일상을 흔든 연하 수리공의 몸. “언젠가 아내를 찾아와 모든 걸 얘기할 거예요?” 멋대로 떠난 그는 뒷모습까지 치사한 남자였다. “그 정도까진 아니었어.” 그에게 그렇게 푹 빠지진 않았었다는 자위는 절망으로 끝난다. 사냥꾼 총에 맞아 죽은 거위,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아 어둠 속에 쓸쓸히 썩어 가는 거위. 주인공은 난데없이 차라리 거위를 사랑하고 싶어진다.

“설터를 읽으면서 글을 진액이 될 때까지 졸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의 말처럼, 설터는 글을 절약한다. “니코는 그가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귓가로 스며드는 흉측한 스페인 이야기와 더불어 자는 동안 맬컴은 그 이야기에 시나브로 중독되어 이제는 그것들이 그의 핏줄 속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자기는 결코 남자가 필요로 하는 것의 일부 이상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여자가 꾸며낸 스페인 이야기들이 말이다.” 니코가 애인 맬컴을 친구에게 빼앗기는 반나절을 그린 ‘탕헤르 해변에서’의 클라이맥스다. 그 미묘한 순간에도 설터는 흥분하지 않는다. 니코와 맬컴이 다시 단둘이 남은 순간. “그들의 입에 침묵이 걸려 있다. 돈을 잃은 노름꾼처럼 둘 다 바닥을 보고 있다.” 다른 말을 보탠다면 군더더기에 불과할 것이다.

책은 1989년 미국의 대표적 문학상인 펜포크너상을 받았다. 설터의 마지막 단편집 ‘어젯밤’(2005)은 2010년 국내 출간됐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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