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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국민이 원하지 않는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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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국민이 원하지 않는 대통령

입력
2016.11.3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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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 장기화 국민의 입장 정리 도와줘

상부권력 흔들려도 국가시스템 온전해

순조로운 권력이양 민주주의 발전 계기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제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고영권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제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고영권기자

37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유고가 철모르는 중학생에게 나라가 망할 것 같은 공포를 가져다 준 데 비하면 지금 청소년의 반응은 꽤 무덤덤하다. 최순실씨 태블릿PC가 언론에 공개된 후 40일 이상 국정에서 멀어진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마침내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처음 밝혔을 때 중학생인 딸의 반응은 “그만두는 게 낫겠지”라고 했다. 국가권력 퇴진이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무심하다.

최순실씨 국정농단 사태 이후 대통령 거취, 국정 정상화와 관련한 야당의 목표가 이리저리 옮겨지고, 대선주자마다 요구를 봇물처럼 쏟아낼 때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 지도자가 은근히 오버랩 됐다. 혼란을 정리하고 요구를 결집해 상황을 타개할 정치력을 갖춘 DJ나 YS 같은 이들 말이다. 지금 시대가 어디 그러한가. 오랜 민주화 투쟁과 죽음을 넘나든 경력에 동지적 감정을 가진 추종자가 만들어 낸 정치적 추진력은 이 시대에 기대하기 어렵다.

따지고 보면 그런 생각은 조급함의 발로다. 오랫동안 경험해 본 적 없는 최고권력의 공백과 국정마비 상황이 갖는 혼란과 불안에 대한 거부감, 조속한 안정을 바라는 심리적 작용이다.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안개도 온도의 균형이 맞춰지면서 자연히 걷히게 마련이다. 그렇게 보면 박 대통령의 완강한 자세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는 느낌이다. 40여일 동안 숱한 의혹과 검찰 수사, 100만명 이상 모인 광화문 촛불집회로 대통령은 반 보씩, 반 보씩 물러서고, 야당은 이를 일축하며, 여당이 분열로 치닫는 복잡하고 혼탁한 정치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뜻이다. 국민이, 박 대통령을 굳건하게 뒷받침했던 지지자마저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지게 됐으니 말이다. 한때 어떤 경우에도 30%가 넘었던 콘크리트 지지율이 역대 최악인 4%로 추락한 결과만 봐도 그렇다. 국민은 혼란한 정국 속에서 국가와 정치시스템을 되돌아보고, 미래의 권력구조 문제를 생각해 볼 여유를 가지게 됐다.

국회에 자신의 거취 문제를 맡기겠다는 박 대통령의 3차 대국민 담화마저 그리 나쁘게만 보이지 않는다. 진정성이 없다거나 탄핵을 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비난이 쏟아지지만, 퇴진을 요구해 온 야당마저도 즉각적 하야가 가져올 혼란을 제대로 감당해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기치 않게 시작될 대선 레이스가 초래할 큰 부작용은 국정농단 사태가 남긴 국정시스템 문제를 하나도 고치지 못한 채 새로운 권력을 들이게 되는 일이다. ‘대통령 자리를 내놓을 일이냐’는 종전의 입장처럼 국회의 탄핵소추와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을 당당히 받겠다고 했다면 법리 문제 등으로 결과가 불투명한 가운데 시간 또한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야당이 책임총리 추천을 거부한 상황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체제를 둘러싼 논란도 해결하기 만만치 않다.

3차 담화의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조기 퇴진에 큰 의미를 부여해야만 한다. “18년간 국민과 함께 했던 여정”을 운운하는 대목은 퇴진 의사를 의심할 바 없고, 탄핵이나 하야 결의, 개헌, 대선 일정 등 권력 이양의 방식과 시기는 국회 몫이 됐다. 정치적 분열과 퇴임 이후 법적인 문제까지 노렸을 법한 전략적 모호성마저도 상황돌파 계책이기보다 궁여지책인 바 결국 국회와 여론의 뜻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이제 박 대통령 이후의 문제를 더 고민할 수 있게 됐다는 점만으로도 나라를 짓누르던 큰 불확실성이 제거됐다. 무엇이 나라를 위해 올바른 것인지, 국정을 조기에 안정시킬 수 있는지 여야가 대국적인 자세로 복잡다기한 사안에 대해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해야 할 단계다.

상부 권력이 무너지는 가운데서도 국가시스템까지 흔들렸다고 보지 않는다. 집단적 공포와 사회적 혼란 없이 순조롭게 권력 이양까지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저력을 과시하는 것은 물론 또 다른 형태의 민주주의 발전을 보게 될 일이다. 위기가 기회이고, 극(極)에 이르면 반(反)이 오게 마련이다.

정진황 논설위원 jhch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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