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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우성과 열성은 없다

입력
2018.01.09 15:12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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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성 인간인가 아니면 열성 인간인가? 자세히 따져보기도 전에 스스로를 우성 인간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과학적인 기준으로 열성 인간이라고 판정 받고 싶지는 않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이나 생명의 우열을 가리는 판단에 따라 으쓱한 마음을 갖거나 움츠러든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고 옳지도 않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을 지나면서 우리는 우성과 열성이라는 표현을 감히 입 밖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레고어 멘델의 유전법칙을 배웠기 때문이다.

멘델은 19세기에 오스트리아에 살았던 신부이자 과학교사였다. 그는 자그마치 7년 동안이나 교배하면서 얻은 2만 9,000여 개의 완두콩에 대한 형질을 조사하여 그 유명한 멘델의 유전법칙을 정리하였다. 멘델 덕분에 생물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우리가 현대 의학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것도 멘델의 연구 덕분이다. 존경! 존경! 존경!

지금 멘델의 세 가지 유전법칙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3대 1(분리의 법칙)이나 9대3대 3대 1(독립의 법칙)이라는 숫자는 누구에게나 익숙할 것이다. 또 3대 1이라는 숫자는 표현형일 뿐이고 실제 유전자형은 1대 2대 1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을 창시한 찰스 다윈보다 낫다. 찰스 다윈은 달라진 형질이 어떻게 후손에게 전달되어 진화하는지를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했다. 멘델이 자신의 논문을 다윈에게 친절하게 보내주었지만 어떤 이유인지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멘델은 둥근 콩과 울퉁불퉁한 콩을 교배시키면 둥근 콩만 나오든지 아니면 둥근 콩이 훨씬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노란 콩과 초록 콩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둥근 형질과 노란 형질을 ‘우성’, 울퉁불퉁한 형질과 초록 형질을 ‘열성’으로 표현했다. 우성과 열성이라는 표현은 너무 쉽게 정한 용어다. 아무리 완두콩이 말 못 하는 생명체라고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우성과 열성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표현이라는 것은 사람의 형질에 비추어 보면 금방 드러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머리카락은 검은색(우성)이고 이마는 직선(열성)이며 눈썹은 외꺼풀(열성)인데 속눈썹은 길다(우성). 코와 콧대는 낮고(열성) 귀는 작으며(열성) 귓불이 뺨에 붙어 있고(열성) 귀지는 바짝 말라 있다(열성). 귀여운 보조개(우성)가 있지만 치열은 고르지 못하고(우성) 입술은 두껍다(우성). 오른손잡이(우성)이고 피부가 검다(우성). 그렇다면 나는 우성 인간인가 아니면 열성 인간인가? 종합적인 평가 대신 분석적으로 본다면, 나는 코와 귀는 열성이고 입은 우성이며 눈은 열성과 우성이 반반인 인간일까?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왼손잡이들이 부럽다. 그들은 왼손과 오른손을 모두 자유롭게 쓰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른손잡이가 우성이란다. 엄마가 색맹이면 아들은 반드시 색맹이 된다. 나는 내가 색맹이 아닌 것을 다행이라고 여긴다. 나는 열성 인간을 부러워하는 우성 인간이 되는 셈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까닭은 우성과 열성이라는 표현 때문이다. 이 표현은 오해와 편견 그리고 혐오로 이어질 수 있다. 우성은 뛰어나고 열성은 뒤떨어진다는 오해를 받는다. 열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 십상이다. 우생학의 근거가 되고 인종차별의 이론적인 배경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굳어버린 용어를 바꾸는 데 매우 인색하다. 중학교 과학 선생님들은 “전류는 양극에서 음극으로 흘러. 하지만 실제로는 전자는 음극에서 양극으로 움직이지.”라는 설명을 매년 해야 한다. 전자를 모르던 시절에 전류는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른다고 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10년 전에 실제로 전자는 음극에서 양극으로 이동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전 세계 과학 선생님들은 귀찮은 설명을 해야 하고 아이들은 괜히 헷갈리고 있다.

우성과 열성이라는 말은 이제 폐기해야 한다. 하지만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쓰고 있는 말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이때 일본의 과학자들이 과감하게 나섰다. 작년 9월 일본 유전학회는 우성과 열성이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대신 현성(顯性)과 잠성(潛性)이라고 쓰기로 했다. 현성이란 ‘눈에 띄는 성질’이라는 뜻이고 잠성이란 ‘숨어 있는 성질’이라는 뜻이다. 정말 기막힌 용어다. 과학적으로도 옳다. 순종 둥근 콩(RR)과 순종 울퉁불퉁한 콩(rr)을 교배시키면 유전자형은 Rr이 된다. 유전자형에는 둥근 성질과 울퉁불퉁한 성질이 다 들어 있다. 그런데 유전자형이 Rr인 완두콩은 둥글다. 그 이유는 두 성질 사이에 우열이 있어서가 아니라 둥근(R) 성질은 눈에 띄고 울퉁불퉁한 성질(r)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 유전학회는 변이는 ‘다양성’으로 그리고 색맹도 ‘색각다양성’으로 바꿔 표현하기로 했다. 유전 정보가 이상하게 변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유정 정보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세상에 우성 인간과 열성 인간 따위는 없다. 다양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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