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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법 통과 좌절딛고 다시 일어선 일본 젊은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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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법 통과 좌절딛고 다시 일어선 일본 젊은이들

입력
2015.10.22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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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시부야에서 학생 단체인 '실즈'(SEALDs)를 주축으로 안보 법률의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18일 열리고 있다. 안보법률은 지난달 18일 일본 국회를 통과했으며 이날로 성립 한 달째를 맞이했다. 도쿄=연합뉴스
일본 도쿄 시부야에서 학생 단체인 '실즈'(SEALDs)를 주축으로 안보 법률의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18일 열리고 있다. 안보법률은 지난달 18일 일본 국회를 통과했으며 이날로 성립 한 달째를 맞이했다. 도쿄=연합뉴스

“여러분~ 포기하지 않고 일본민주주의를 위해 행동을 계속합시다!”“안보법안 반대 운동이 끝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다시 시작합시다!”

집단자위권 행사를 용인하는 안보법안의 국회통과 한 달을 맞은 지난 18일, 도쿄 ‘젊은이의 성지’인 시부야(澁谷)에서 대규모 집회가 되살아났다. 올 여름 “전쟁법안 반대”를 외치며 지요다(千代田)구 국회의사당 앞을 뜨겁게 달궜던 바로 그 젊은이들이 안보법 통과 한 달을 맞아 다시 뭉친 것이다. 반대여론 확산에 구심점 역할을 한 학생단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 긴급 행동’(실즈ㆍSEALDs). 법안통과를 저지하겠다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각자의 생활로 돌아갔지만, 지금 ‘일본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앞으로도 일상 속에서 반대 목소리를 재개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안보법안 국회 통과 한달, 활동 재개한 실즈

“법이 통과됐어도 항의가 끝난 건 아닙니다. 여당의 날치기를 잊지 맙시다!” 국제기독교대 4학년인 고바야시 가나 학생이 연단에 오르자 큰 함성이 쏟아졌다. 고바야시는 법안통과 후 대학 캠퍼스로 돌아갔지만 많은 친구들이 여전히 안보법안 자체를 모르는 현실에 실망이 컸다. 방학을 이용해 독일 단기연수를 갔을 때 이민문제에 대해 배타적 주장을 하는 시위대를 몇 배나 많은 일반시민들이 둘러싸 항의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감동을 받았다고 있다. 그러면서 “일본에선 아직 정치가 일상에 뿌리내리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래도 이들은 변화의 싹이 움트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정치에 대해 무관심한 몇몇 친구가 이날 집회에 얼굴을 드러냈다며 기뻐했다. 고교 3년생인 후쿠다 군은 올 여름 법안반대 고교단체인 ‘틴즈 소울’주최 행사에 단골로 참가했다. 연일 국회 앞으로 나갔던 그는 일상의 학교로 돌아온 뒤 친구들의 반응에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수험생이 뭐 하는 짓이냐”고 냉소하던 친구들이 응원자로 바뀌었다. 쉬는 시간엔 18세 이상 투표권을 처음으로 갖는 내년 참의원 선거가 화제로 오른다고 한다.

‘겐포 마모레, 이마스구 하이안’(헌법을 지켜라, 지금 당장 안보법안을 폐기하라)는 구호를 절규하듯 외치는 장면과 함께 거의 매일 TV 화면에 등장했던 실즈의 중심인물, 오쿠다 아키(23ㆍ奧田愛基·메이지가쿠인대 4학년)는 이날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본인과 가족을 살해하겠다는 협박편지가 날아든 뒤 경찰의 보호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자신이 집회에 참가하면 경호인력이 따라붙어야 한다. 그는 주로 도서관에 통학하며 대학원 진학을 준비 중이지만, 각자 일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야당이 연합해 안보법안 폐기 이슈를 제기할 것으로 보이는 내년 참의원 선거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각목 들던 60년대 전공투, 춤추며 구호 외치는 실즈

올 여름 안보법안 논쟁이 일본 사회를 달구면서 등장한 대학생 중심 단체가 ‘실즈’다. 정치에 무관심하던 일본 젊은이들이 내년 7월 참의원 선거부터 투표권이 18세 이상으로 확대되는 점과 맞물려 기존 정치지형을 견제할 파워그룹으로 성장할지 관심을 끌고 있다.

일본 실즈 집회 포스터
일본 실즈 집회 포스터

실즈는 2년 전에 탄생했다. 기밀을 누설한 공무원의 처벌수위를 대폭 강화해 알권리 침해 논란을 빚은 특정비밀보호법이 국회를 통과한 2013년 12월6일 메이지가쿠인대, 국제기독교대 등의 학생들이 만든 ‘특정비밀보호법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모체다. 이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기초한 정치를 요구한다’‘우리는 입헌주의를 존중하는 정치를 요구한다’고 활동기조를 표방했다. 헌법기념일인 지난 5월3일 출범해 6월초부터 매주 금요일 저녁 국회의사당 앞에서 안보법 반대 집회를 열어왔다. 회원이 전국에 300명선이었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활동상황이 알려지면서 동조세력이 급속히 불어났다. 대학생은 물론 젊은 직장인, 고교생, 주부, 과거 학생운동을 체험한 중장년층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일본 사회는 지금 이들에게서 1960, 70년대 전공투(全共鬪) 이후 일본 역사무대에서 사라진 학생운동의 부활을 지켜보고 있다. 1970년대 초반 좌파 학생운동인 전공투가 지나친 과격화와 내부 분열로 소멸한 이후 일본 대학가에선 학생운동이 자취를 감췄다. 특히 1990년대 버블경제 붕괴,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일본 대학생들은 정치이슈 대신 취업과 개인사에 집중했다. 아르바이트가 생업이 되는가 하면 돈벌이와 출세에 관심이 없는 ‘사토리 세대’의 등장, 연애나 결혼에 소극적이고 야성미를 상실한 ‘초식남’등 이렇게 무기력하고 순응적 이미지로만 비춰지던 일본 젊은이들이 아베 정권의 우경화 흐름에 제동을 걸며 ‘분노’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즈는 과거 전공투가 지나친 폭력성으로 도태됐던 것과 달리 질적으로 다른 시위문화를 선보이고 있다. 각목을 휘두르던 전공투와는 확연히 다르다. 사다리에 올라선 대학생 남녀가 마이크를 치켜들고 빠른 템포로 뭔가를 외치면, 모두가 리듬에 맞춰 소리 높여 따라 한다. 야광봉을 들고 몸을 흔드는 학생, 템버린을 흔들며 흥을 돋구는 풍경이 마치 축제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저마다 인쇄하거나 직접 써온 개성 넘치는 문구도 눈길을 사로 잡는다. ‘아베 정치를 용서할 수 없다’‘PEACE, NOT WAR’‘헌법 9조를 지켜라’에 그치지 않고, 콧수염을 단 아베 총리 가면을 얼굴에 쓴 채 히틀러처럼 팔을 치켜들어 나치를 빗댄 퍼포먼스까지 톡톡 튀는 젊은 감각이 신선하다. 경쾌한 랩송을 연상케 하는 외침과 염색 머리에 핫팬츠 차림, 내려 입어 엉덩이 중간쯤 걸친 바지. 이념에 경도됐던 과거 일본 운동권과 달라도 한참 다르다. 노동조합, 대학 학생회 중심 일률적 조직, 이른바 투쟁전문가들이 주도하는 집회와 달리 지금은 일반인이나 아이를 업은 주부의 자연스러운 동참을 끌어내고 있다. 심각한 시위가 아닌 젊고 흥겹고 발랄한 분위기다.

이들이 작성한 ‘전후 70년 선언문’을 봐도 과거 운동권의 현학적 이론은 찾아볼 수 없고 친근하다. “아시아ㆍ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7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그중에서 20여년 밖에 모릅니다. 전쟁의 시대를 살아오지 않은 우리가 모르는 일, 알 수조차 없는 일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와 마주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과거를 진솔하게 받아들이고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어나가겠습니다.”

내년 참의원 야권공조 주도 실즈, 극우세력 공격 나서

이제 실즈의 관심은 올 여름 안보법 저지투쟁 좌절 이후 새로운 활동이다. 일본 내에선 지금 실즈의 ‘실험’이 한 여름밤의 해프닝으로 끝날 것이란 냉소와, 내년 참의원 선거에서 야당돌풍의 진원지가 될 것이란 기대가 엇갈리고 있다.

그래도 실즈는 안보법 반대투쟁 과정에서 탄생했지만 이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기대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들은 아베 정권이 던진 사회전반의 우경화 이슈에 대해 일본사회 내에 저항 담론을 만들고 확산하겠다는 의욕을 분명히 했다.

이들은 우선 내년 참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연대해 각 선거구 단일후보를 공천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민주당의 간 나오토(菅直人) 전 총리는 실즈의 향후 역할과 관련 “기존 노동조합이나 학생운동의 분파적 행보와 다르다, 현존하는 야권개편을 넘어 새로운 운동 흐름으로 연결될지 주목된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우익의 공격을 어떻게 뚫고 나갈 지가 관건이다. 극우세력은 이미 실즈의 등장에 적잖이 긴장하고 있다. ‘네트 우익’이라 불릴 만큼 극우세력의 선전장 일색이던 인터넷 공간에서 실즈가 빠르게 여론을 되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우익들은 이미 ‘이지메(집단괴롭힘)’에 들어갔다. 실즈의 대표 얼굴인 ‘오쿠다가 재일 한국인이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는가 하면 ‘살해협박 편지’가 배달되고, 그의 아버지인 오쿠다 도모시(52)씨에 대한 인신공격도 난무하고 있다. 기타규슈(北九州)시에서 개신교 목사로 재직중인 그에 대해 “반 일왕(天皇)주의자다”“노숙자 지원운동을 하며 인근주민의 지원시설 반대를 인권침해로 몰아가고 있다”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부 극우매체는 세계 여러 나라의 시위를 비교해 “홍콩과 대만의 젊은층 시위는 반 중국 의식이 깔려있고, 한국의 안보법안 반대는 친 중국이 뚜렷해 실즈 소식을 호의적으로 보도한다”며 “지금 일본에선 화살이 어디로 돌아가고 어떻게 이용될지 실즈는 정신차리라”고 터무니없는 애국논리를 앞세워 이들을 공격하고 있다.

실즈가 우익세력의 이런 전방위적 공격을 이겨내고 내년 7월로 예상되는 참의원선거까지 어떤 활동을 펼쳐나갈지 주목된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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