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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에 선 남미 좌파벨트

입력
2017.03.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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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아의 그림자 ‘레닌 모레노’

서민시대 열었던 좌파정권에 ‘미워도 다시 한 번?’

대권 재수생 ‘기예르모 라소’

국가개조 선언한 우파 후보 변혁 일으킬까?

레닌 모레노 후보가 22일 에콰도르 수도 키토에서 열린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왼쪽 사진). 기예르모 라소 후보가 21일 키토에서 대선 유세 도중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키토=AFP 연합뉴스
레닌 모레노 후보가 22일 에콰도르 수도 키토에서 열린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왼쪽 사진). 기예르모 라소 후보가 21일 키토에서 대선 유세 도중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키토=AFP 연합뉴스

에콰도르 수도 키토에 사는 음악가 루이스 가르시아(33)는 내달 2일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를 앞두고 머리가 혼란스럽다. 라파엘 코레아(54)는 가르시아가 2006년 처음 뽑은 대통령이었다. 이후 대선이 두 차례 더 치러졌지만 그에게 대통령은 코레아 뿐이었다. 코레아는 훌륭한 지도자였다. 원유를 팔아 번 돈과 부자들로부터 거둔 세금을 가난한 국민을 위해 아낌없이 썼다. 병원을 세우고 도로도 닦아 잘 정비된 키토 거리에는 새 차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3년 전부터 국민 모두가 잘 사는 ‘평등한 세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정부 수입이 줄면서 각종 복지혜택이 사라지더니 형편은 계속 나빠졌다. ‘시민 혁명’으로 칭송받던 코레아 정부는 어느덧 ‘부패 집단’으로 전락했다. 코레아는 이번 대선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가르시아는 그의 뒤를 잇는 후보에게 선뜻 투표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빈곤을 벗어나게 할 뾰족한 해법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에콰도르 유권자들은 가르시아와 같은 마음이다. 서민의 시대를 활짝 열었던 좌파정권에 ‘미워도 다시 한번’을 외쳐야 할지, 아니면 국가 개조를 선언한 우파 후보에게 기회를 줘야 할지 기로에 서 있다. 에콰도르 국민만 표심 향배에 민감한 것은 아니다. 국제사회도 인구 1,600만명 남짓한 남미 소국의 선거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최근 1년 반 새 아르헨티나, 페루, 브라질에서 좌파정권이 줄줄이 몰락하면서 에콰도르 대선은 10년 전성기를 구가한, 이른바 ‘핑크 타이드(Pink Tideㆍ온건 사회주의 물결)’의 해체와 소생 여부를 가를 국제적 관심사가 됐다.

영광ㆍ몰락 혼재된 코레아 정권 10년

에콰도르 대선 결선투표에 나서는 후보는 집권 국가연합당의 레닌 모레노(64)와 중도우파를 표방한 기회창조당의 기예르모 라소(62). 2월 19일 실시된 1차 투표에서 모레노는 39%, 라소는 28%를 각각 득표했다. 대선 규정상 1차 투표에서 당선이 확정되려면 유효 투표수의 과반 지지를 얻거나 40% 이상을 득표하되, 2위 후보와 10%포인트 차이가 나야 한다. 모레노 후보가 1%를 더 득표하지 못해 결선투표가 치러지는 셈이다.

겉으로는 모레노 후보의 우세로 비쳐지나 에콰도르 역시 득세와 몰락으로 이어진 남미좌파 ‘영욕의 방정식’을 답습했다는 점에서 다소 의외의 결과로 볼 수 있다. 2007년 대권을 거머쥔 코레아 현 대통령은 ‘신 사회주의’를 내걸고 빈민의 대변자를 자처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좌파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배럴당 100달러가 넘는 고유가에 힘입어 막대한 원유 수입을 무상복지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2013년 호황이 끝나고 저유가의 역습이 가시화하자 국가 경제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코레아의 실책은 한 때 250억달러가 넘던 원유 수입이 반 토막 아래로 떨어졌는데도 사회복지프로그램 재원을 전혀 줄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가 재정을 확충하려 중국 기업에 석유ㆍ광산 채굴권을 마구 남발한 탓에 빚은 쌓여 갔고, 비정부기구(NGO)와 환경단체들을 적으로 돌렸다. 대통령이 매주 직접 TV에 나와 비판 언론에 독설을 퍼붓는 등 권위주의도 심화했다.

지난해 에콰도르의 경제성장률은 -2.0%.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성장률 역시 -2.7%로 암울하게 내다보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사회과학연구소의 프랭클린 라미레즈 교수는 “코레아 정권 10년은 빈곤층의 소비 규모만 키웠을 뿐, 경제구조의 빈약한 자생력은 그대로였다”며 “좌파의 헤게모니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남미 좌파 명맥 잇나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의 폐해가 명백히 드러났는데도 집권 여당이 선전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모레노 후보 개인의 힘이었다. 아마존 산골에서 태어나 사업가로 자수성가한 이력, 강도(1998년)를 당해 하반신을 쓸 수 없게 된 뒤에도 웃음전도사로 변신해 장애를 극복한 의지, 부통령과 유엔 특사로 일하면서 장애인 인권ㆍ복지에 헌신한 공로…. 유권자들은 그런 인간적 매력에 열광했다.

하지만 그의 특별함은 여기까지였다. 모레노의 공약에는 여전히 코레아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나라 곳간은 텅텅 비었는데 공무원 수를 유지하고, 복지지출도 삭감할 계획이 없다고 천명했다. 한술 더 떠 모든 노인에게 월 100달러의 연금지급을 공언하는 등 허리띠를 졸라맬 대안은 도통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비판세력은 코레아가 당내 기반이 취약한 모레노를 꼭두각시 삼아 수렴청정을 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현지 전문가를 인용해 “물 없는 물고기를 상상할 수 없듯이 코레아는 정치를 떠나 살 수 없는 독재자”라고 비판했다.

라소 후보는 모레노의 대척점에 있다. 2013년 대선에서 코레아에게 패한 대권 재수생 라소는 과야킬 은행장을 지낸 경제통답게 재정 파탄의 원흉인 공공부문 지출을 대폭 줄이고 감세, 규제 철폐 등을 경제난 극복의 해법으로 제시했다. “기업가정신을 고취해 민간기업 투자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게 라소의 지론이다. 그러나 영국 가디언은 “라소도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돈을 빌리는 등 대외자본에 의존해 장기 비전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판세는 안개 속이다. 당초 1차 투표 직후에는 우파의 결집으로 라소 후보의 승리가 점쳐지기도 했으나 가장 최근인 18일 실시된 현지 여론조사에서는 모레노가 50.61%를 득표해 라소(36.72%)를 제칠 것으로 예측됐다. 물론 변수는 있다. 모레노의 러닝메이트인 조지 글라스 부통령 후보는 현재 본인의 부인에도 국영 석유회사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는 스캔들에 연루돼 있다. 남은 기간 정권의 아킬레스건인 부패 문제가 집중 부각될 경우 표심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는 평가다.

누가 당선되든 에콰도르 대선 결과는 21세기 초 남미 대륙을 휩쓴 좌파벨트에 변화를 몰고 올 전망이다. 가브리엘라 리바데네이라 에콰도르 국회의장은 미 뉴욕타임스에 “변혁은 시작됐다. 이번 대선을 통해 남미 지역은 다음 단계의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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