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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은 선거 중] ‘돈 줘야 찍는’ 남태평양 빈국의 민주주의 실험

입력
2017.07.07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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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간 호주 식민지 1975년 독립

TV보급 10%, 라디오가 주 매체

공무원 수당 못 줘 투ㆍ개표 지체

사전 기표ㆍ투표함 탈취 등 혼탁

유권자들은 금품수수 당연시

경찰, 대학생 시위대에 발포도

집권 정당성ㆍ경제불황 책임 논란

오닐 총리 연정 승리할 지 관심

파푸아뉴기니 총선을 앞둔 지난달 21일 수도 포트머스비에 한 후보자 차량에 선전 포스터가 붙어 있다. 포트머스비= AP 연합뉴스
파푸아뉴기니 총선을 앞둔 지난달 21일 수도 포트머스비에 한 후보자 차량에 선전 포스터가 붙어 있다. 포트머스비= AP 연합뉴스

‘마라톤 선거가 시작됐다.’

지난달 26일 미국의소리(VOA)는 파푸아뉴기니의 총선 시작을 이렇게 알렸다. 서쪽으로 인도네시아와 남쪽으로 호주와 접하고 있는 남태평양 섬나라 파푸아뉴기니. 70년간 호주 식민지였다가 1975년 영연방국가로 독립한 이 섬나라에 마라톤처럼 긴 선거가 진행되고 있다. 5년 주기로 치르는 국회의원 교체(111명) 선거다. 지난달 24일 투표가 시작돼 8일 투표가 종료된다. 유권자는 500만명 남짓이지만 투표 기간은 2주나 된다. 파푸아뉴기니가 여러 섬으로 이뤄진 데다 도시 인구가 18%(세계 평균 49%)밖에 안될 정도로 통신ㆍ교통 시설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고사하고 TV보급률도 10%에 못 미치고 유권자들은 주로 단파 라디오를 통해 뉴스를 접할 정도인 저개발 국가다. 이번 총선 결과에 따라 2011년부터 총리직을 맡고 있는 피터 오닐이 이끄는 민중국가의회당(PNC) 중심 집권 연정의 재집권 여부가 판가름 난다.

수당 줘야 개표하는 선관위… 여전한 유권자 매수

“혼란스러움(Chaotic).”

파푸아뉴기니 전 총리 라비 나말리우(1988~1992년 재임)가 이번 총선 과정을 압축해 표현한 말이다. 행정력 미비로 투ㆍ개표가 지연되는 것은 물론이고, 부정선거 사례도 속속 보고되고 있다. 기반 시설이 비교적 잘 갖춰진 수도 포트머스비에서조차 혼란 속에 선거가 치러지고 있다. 지난달 26일 개시될 예정이었던 이 지역 투표는 30일에야 시작됐고, 1일로 예정됐던 개표작업도 5일이나 지체됐다. 황당하게도 선거 관리자들이 수당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투개표 작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메케레 모라우타 전 총리(1999~2002년 재임) 역시 라디오 뉴질랜드와 통화에서 “이번 총선은 내가 눈으로 지켜본 가장 어지러운 선거”라면서 “불행하게도 집권당이 이를 조장했다”고 주장했다. 절차상 미비로 인한 혼란만이 아니다. 부정 선거 정황도 속속 외부에 알려지고 있다. 선거 직전 포트머스비의 선관위 관계자가 미화 5만달러와 사전 기표가 된 투표용지를 운반하다가 경찰에 체포됐고, 북서부 하이랜드 한 선거구에서는 투표함이 파괴되거나 탈취되기도 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일부 지역에서 관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투표가 이뤄지거나, 주로 부족별로 갈라진 유권자끼리 혹은 유권자와 경찰 간에도 폭력사태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반정부 성향이 강한 지역에서는 유권자가 누락된 명부나 ‘유령 유권자’ 가 등록돼 있는 경우도 보고되고 있다.

독립 이후 벌써 9번째 치러지는 총선으로, 과거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금품 살포 등 사실상 유권자 매수가 여전히 횡행한다는 점은 더욱 큰 문제다. 한 출마 후보자의 부인인 마리암 놈브리는 지난 5월 호주 ABC방송과 인터뷰에서 “유권자들은 후보자들이 당연히 돈을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권자들은 정부가 예산을 집행해 정책으로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를 아예 않는다”며 “사람들은 당장 현금이 필요하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고 씁쓸해했다. 방법이나 과정이야 어떻든 무언가를 배분해줘야 지역에서 신뢰할만한 지도자라고 인정받는 멜라네시아(남태평양의 섬 지역) 전통이 절차적 투명성을 강조하는 현대 민주주의와 충돌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야당인 파푸아뉴기니당(PNGD) 삼 바실 부대표는 “돈과 정치의 결합은 민주주의를 살해할 것”이라며 “이런 식으로 선거가 계속된다면 의회민주주의뿐 아니라 헌정 질서에 대한 존경심이 약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편 라디오 뉴질랜드는 파푸아뉴기니 동부 래이 대학 학생들이 지난달 29일 관권선거에 항의하는 의미로 투표지 1,500장을 불태웠고, 경찰은 시위 진압을 위해 발포했다고 전했다.

헌정 혼란 논란 인물 오닐 재집권할까

현재 의회는 다수당인 PNC(54석)를 중심으로 6개당이 연합한 집권 연정이 82석을 차지, 11개당과 무소속 후보들로 이뤄진 야당(26석)을 압도하고 있다. 피터 오닐 총리는 압도적 의회 지지를 근거로 선거 승리를 낙관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는 2011년 8월 전임 마이클 소마레 총리가 신병 치료를 위해 싱가포르에 간 사이 의회 추대로 총리가 된 논란의 인물이다. 그해 말 대법원은 오닐 총리 직무 수행이 위헌이라고 결정하고, 소마레 총리 복귀를 명령했지만, 오닐 총리는 이를 무력화하고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파푸아뉴기니 최대 법률회사에 정부 예산 지출을 불법으로 승인한 의혹으로 수사 대상에 올랐으나 수사 책임자를 해임하는 등 2년 이상 수사를 거부하면서 반발을 사고 있다. 지난해 6월에는 경찰이 총리 퇴진을 요구하는 파푸아뉴기니대 학생들에게 발포해 학생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야당을 중심으로 집권당이 이번 총선에서 관권선거와 부정선거를 획책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지만 오닐 총리는 “실패한 정치 지도자들이 증거도 없이 그런 주장을 한다”며 “우리나라 선거관리 기구는 독립성이 보장돼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오닐 총리와 집권당은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공약으로 내걸고 특히 저학력ㆍ저소득층을 겨냥해 선거운동을 해왔다. 오닐 총리는 “결과가 말해줄 것”이라며 선거에서 압승해 집권 정당성을 보장받겠다는 계획이다. 선거 승리 여세를 몰아 내년 11월에는 포트머스비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참석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개최해 국제적 위상도 높이겠다는 속내다. 반면 야당은 오닐 집권기 경제 불황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고 있다. 금, 석유, 구리, 천연가스 등 자원 부국인 파푸아뉴기니는 광산붐과 국제원자재가 상승에 힘입어 2007~2012년 연 평균 6% 이상 성장(아시아개발은행)했지만 이후 성장세가 둔화됐고 국가부채도 늘어났다. 제1야당인 승리유산당(THEP) 돈 폴예 대표는 “국가 부채는 파푸아뉴기니를 구해낼 수 없다. 이는 우리나라를 땅속에 묻힌 관처럼 깊이 침체시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주간 치러진 이 마라톤 선거 결과는 약 2주 뒤인 이달 말쯤 나온다. 파푸아뉴기니 총선은 다종족ㆍ다언어, 지리적 불리함과 전근대와 현대의 공존이라는 다중고를 겪고 있는 저개발 국가의 민주주의 성과를 시험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왕구 기자 fab4@hankookilbo.com

피터 오닐 파푸아뉴기니 총리
피터 오닐 파푸아뉴기니 총리
돈 폴예(오른쪽) 파푸아 뉴기니 승리 유산당 대표
돈 폴예(오른쪽) 파푸아 뉴기니 승리 유산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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