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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길 위의 이야기] 샘쟁이

입력
2017.02.09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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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샘쟁이다. 스물다섯 살에는 서점엘 갔다가 최인석 소설가의 소설 ‘나를 사랑한 폐인’을 보고 그만 화들짝 놀랐다. 그건 분명 내가 쓰려고 했던 제목이었다. 단지 아직 떠오르지 않았을 뿐, 진짜 내가 막 쓰려고 했던 거였다. 샘이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고영민 시인의 시 ‘앵두’도 내가 먼저 쓰려고 했던 거다. 진짜다. 나는 부릉부릉 스쿠터를 타고 간간 브레이크를 밟으며 누군가의 마당으로 들어서는, 사랑스런 앵두 같은 여자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고영민 시인이 나보다 먼저 써버렸다. 나는 햇살 따신 날이면 작은 소파에 누워 ‘앵두’를 여러 번 읽으며 시인에게 샘을 냈다. 그러고는 또 나보다 먼저 풀 많은 마당에 들어선 앵두 같은 그녀에게도 샘을 냈다. 나는 공손한 작가가 되고 싶었다. 생에 있어 공손한 작가 말이다. 사람의 기억과 아픔과 고독을 업신여기지 않는 공손한 작가. ‘추운 겨울 어느 날/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사람들이 앉아/밥을 기다리고 있었다/밥이 나오자/누가 먼저랄 것 없이/밥뚜껑 위에 한결같이/공손히/손부터 올려놓았다’ 그러니 고영민 시인이 쓴 이 ‘공손한 손’이라는 시에 어찌 샘을 내지 않을 수 있을까. 벽에 까만 TV가 매달린 작은 식당엘 가고 싶다. 돼지고기 숭숭 썰어 넣고 끓인 김치찌개를 시키고 먼저 나온 밍밍한 콩나물무침과 깍두기를 조물조물 집어먹고 싶다. 그러다 맨질맨질 때 탄 앞치마를 두른 뚱뚱한 여주인이 따끈한 공기밥을 내어준다면 밥뚜껑 위에 공손히 두 손을 올려놓아야지. 오늘도 이 생, 이렇게 이어나갈 수 있어 고맙습니다, 누구에게랄지 몰라도 더없이 공손하게 인사를 드려야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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