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이계성 칼럼] 우생마사(牛生馬死)

입력
2014.12.15 18:11
0 0

비선 실세 국정농단 파문에 성난 민심 외면

말이 헤엄 믿고 격류 거스르다 지쳐 죽는 격

소통과 권한 위임 없는 국정 스타일 바꿔야

말은 헤엄을 잘 친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얘기다. 유비가 제갈량을 만나기 전 형주자사 유표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을 때다. 산적을 토벌하고 두목이 타던 적로마(的盧馬)라는 말을 얻었다. 이마에 흰 점이 박힌 말인데 주인에게 화를 불러오는 흉마(兇馬)라며 타지 말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유비는 적로마를 애마로 삼았다. 유표 부하들이 그를 위험한 인물로 보고 죽이려고 했을 때 유비는 이 적로마의 헤엄 실력 덕분에 목숨을 건진다. 적로마는 깊고 넓은 단계(檀溪)를 단숨에 헤엄쳐 건너 추격자들을 따돌렸다.

소도 웬만큼 헤엄을 치지만 말보다는 실력이 크게 뒤진다고 한다. 그런데 홍수로 급류가 생겼을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말은 자기의 실력을 믿고 물살을 거슬러 가려다 결국 힘이 다해 익사하고 말지만 소는 거센 물살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다 조금씩 물가로 다가가 목숨을 건진다고 한다. 우생마사(牛生馬死)라는 사자성어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청마(靑馬)의 해가 거의 다 저물어가는데 말 이야기를 꺼내는 게 조금은 생뚱맞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연말 정국을 강타하고 있는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 논란을 보면서 새삼 우생마사 얘기가 떠올랐다.‘정윤회 문건’에 담긴 내용의 진실 여부와 상관 없이 비판 민심은 이미 거대한 격류가 되어 넘실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래 처음으로 지지도가 30%대(39.7%, 리얼미터 8~12일 조사)로 추락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찌라시 수준의 터무니 없는 얘기”라며 정면 돌파의 기세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거센 민심의 격류를 거슬러 헤엄치고 있는 격이다.

박 대통령은 비선 실세라는 정윤회씨에 대해 “오래 전에 내 옆을 떠났고, 전혀 연락도 없이 끊긴 사람”이라고 했다. 친동생 박지만 EG그룹회장 부부에 대해서는 “ 역대 정권의 친인척 관리를 보고 청와대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반신반의하지만 나는 사실에 가깝다고 보는 쪽이다. 정씨가 십상시를 통해 국정을 농단한다는 문건 내용은 일부 사실을 침소봉대한 허구일 수 있고, 청와대의 강도 높은 친인척 관리가 불만인 지만씨 측의 피해의식이 정씨와의 갈등설로 증폭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많은 국민들이 이번 파문을 청와대 안팎을 무대로 전개되는 권력 암투극으로 바라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이번 파문이 아무것도 아닌 단순 해프닝 내지 허구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진상이 무엇이든 이번 파문과 소동의 근저에는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이 자리하고 있다. 비선의 국정농단 파문을 키우고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누구보다도 박 대통령 자신에게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대화와 소통, 권한 위임에 관한 한 박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낮은 점수를 받고 있다. 장관들은 물론 청와대 주요 수석비서관들조차 박 대통령에게 대면보고 기회가 드물다는 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청와대 집무실이 아니고 관저에 머무는 시간이 많으면 주로 접촉하는 인사는‘문고리 권력’일 수밖에 없다. 세월호 사건 당일 ‘7시간’ 논란도 결국 관저 근무 선호에서 비롯됐다.

전임 이명박 대통령만 해도 수석비서관실을 찾아 스스럼 없이 대화하고 토론하는 일이 많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토론이 너무 많아서 탈이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토론을 즐겼다. 반면 박 대통령은 보고서를 먼저 받아 읽고 나중에 전화 등을 통해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자신이 없어서 그런다는 말도 하지만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고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탓일 수도 있다.

권위주의 시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까지도 상당 폭으로 권한과 책임을 위임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인사와 중요 정책 결정에 있어 위임 수준이 낮다. 문고리 3인방과 비선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업무처리 스타일이다. 성난 민심은 바로 이 대목을 향하고 있다. 이 민심을 거슬러 헤엄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청마의 해가 다 가기 전에 박 대통령은 우생마사의 교훈을 뼈아프게 되새길 필요가 있다.

수석논설위원 wk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