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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8할은] 어릴 적 형이 불러준 노래가 아직도 귓가에…

입력
2017.04.2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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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삶을 바꾸는 순간이 있습니다. 유명 문화계 인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들의 인생에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남긴 작품 또는 예술인을 소개합니다.

어려운 시절을 살았다. 라디오도 없던 시절 임헌정 서울대 교수가 들었던 음악은 형, 누나가 불러주던 노래, 교회의 찬송가가 전부였다. '고향노래' 들이다. 신상순 선임기자
어려운 시절을 살았다. 라디오도 없던 시절 임헌정 서울대 교수가 들었던 음악은 형, 누나가 불러주던 노래, 교회의 찬송가가 전부였다. '고향노래' 들이다. 신상순 선임기자

요즘 금수저와 흙수저가 화두다. 전쟁 직후 우리 세대는 수저 자체가 없는 ‘무수저’였다. 라디오도 전화도 없었고 먹을 것조차 없던 시절이다. 음반이라는 걸 접해볼 수 없었다. 음악을 전공으로 하겠다는 생각은 당연히 하지도 못했다. 그 시절 내가 들었던 음악은 교회의 찬송가가 거의 전부였다.

우리 집 막내로 태어난 난, 큰 누나와 나이 차이가 25살이나 났다. 누나들은 전쟁 후 가계를 돕기 위해 사범학교를 나와 선생님이 됐다. 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쳤던 누나에게 가끔 피아노를 배웠다. 당시 충북 제천읍에 딱 한 대 있던 피아노는 누나가 한 대를 더 구입하면서 두 대가 됐다. 음악은 그렇게 가난한 삶 속에 조금씩 머물러 있는 정도였다.

사실 배우고 싶었던 악기는 바이올린이었다. 태어났던 청주, 학교에 입학한 후 이사 갔던 제천과 중학교를 다녔던 원주에서도 바이올린은 구경도 못했다. 대신 첼로를 배울 수 있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와 같은 재단에 속한 대광중의 현악반에 들어간 덕분이다. 학교에서 악기와 레슨비를 모두 지원해준 덕분에 현악기를 내 손으로 잡아볼 수 있게 됐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중학교 3학년 때 서울에 사는 매형이 나를 서울로 데려가 준 덕에 그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으므로 실은 매형이 은인이다. 그렇게 피아노와 첼로, 교회를 오가며 음악과 가까워졌다.

음대에 진학하겠다는 생각은 얼떨결에 하게 됐다. 음악을 배운 이유도 실은 신학대에 가고 싶었기 때문인데 누나들이 “넌 음악에 재간이 있는 것 같으니 음대에 가서 교회음악을 해 보라”고 조언해줬다. 그때서야 ‘레슨’이라는 단어를 알게 됐고, 누나들의 도움으로 고등학교 3학년 9월부터 작곡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대학입시까지 단 4개월뿐이었다. 그런데 작곡과에 진학하기 위해 배우기 시작한 화성법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들어 온 찬송가를 떠올리니 저절로 습득이 됐던 것이다. 작곡가 아버지를 둔 짝꿍에게 어려운 부분들을 물었고, 이미 대학에 진학한 선배가 가끔 학교에 놀러 와 내 공부를 도와줬다.

어려운 시절을 살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에 음악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간직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자랄 수 있었던 것 같다. 음대에 진학한 후 내 삶은 완전히 음악이 됐다. 돌이켜보면 음악을 전공하겠다는 생각은 못했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내 삶에는 이미 음악이 스며들어 있었다. 교회의 풍금소리와 형, 누나들이 불러주던 노랫소리가 귓가에 생생하다.

다섯 살 무렵이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형이 날 안고 불러주던 노래가 기억난다. “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그 여름날이 가면 더 세월이 간다.” 그리그가 작곡한 ‘솔베이지의 노래’다. 그 멜로디가 아주 강렬하게 남아있다. 집에는 ‘명곡선’이라고 적힌 가곡집이 있었다. 슈베르트와 토셀리의 세레나데, 그리고 ‘솔베이지의 노래’. 형은 가곡집을 펼쳐 들고 창문 밖에 보이는 우암산을 바라보며 나에게 노래들을 들려줬다. 그래서 내게 ‘솔베이지의 노래’는 고향노래와 같다. 올해 창단 20주년을 맞은 원주시립교향악단(원주시향)과 함께 하는 공연에서도 이 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원주중학교를 졸업한 데다 원주시향 창단 당시 명예음악감독을 했던 인연으로 제2의 고향과도 같은 원주에서 고향 노래를 연주한다는 의미가 있다. ‘솔베이지의 노래’는 실제로도 객지에 나간 이를 그리워하는 노래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늘 고향이 자리잡고 있지 않은가.

나에게 또 다른 고향노래는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신세계로부터’)이다. ‘신세계 교향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체코 출신인 드보르자크가 미국에 있을 때 고향을 생각하며 쓴 곡이다. 1989년부터 25년 간 상임지휘자를 맡았던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부천필)의 취임연주회 때 이 곡을 연주했다. ‘부천필의 고향 만들기’라는 취지로 시민들에게 부천시를 자랑거리로 만들어주고 싶다는 의미였다. 부천필 첫해에는 ‘솔베이지의 노래’가 들어 있는 ‘페르귄트’도 함께 연주했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코리안심포니)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임지휘자로서 취임연주회 때는 물론 지난해 코리안심포니와 함께 프랑스에 초청받았을 때도 ‘신세계 교향곡’을 연주했다. 원주시향, 청주시립교향악단에 처음 객원지휘자로 초청받았을 때 지휘했던 곡도 이 곡이다.

모든 작곡가들은 말년이 되면 고향노래로 귀의한다. 스트라빈스키, 베토벤, 모차르트, 쇼팽, 바흐 모두 마찬가지였다. 쇼팽이 피아노곡으로 작곡한 ‘폴로네즈’는 그의 고향 폴란드 춤곡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고향에서 불리던 노래 중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동요가 많고, 특히 서양 음악가들의 말년에는 찬송가풍인 곡도 꼭 등장한다. 말러의 교향곡들만 봐도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음악은 기독교 문화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음악 속에 등장하는 십자가와 지옥을 기독교적 개념을 알지 못하고는 연주하기 어렵다.

내 마음 속에 지속적으로 남아있는 작품들도 어렸을 때 들었던 동요와 찬송가가 많다. “울 밑에 해바라기 꾸벅꾸벅 맴돌다 맴돌다 잠이 들고, 앞마당의 바둑이 쌔근쌔근 닭 쫓다 닭 쫓다 잠이 들고.” ‘여름’이라는 제목의 이 곡은 가사는 물론 음도 너무나 아름답다. 명색이 작곡과 출신으로서 나도 언젠가 이러한 작품을 한 곡 정도 쓰고 싶다는 바람도 갖고 있다.

약학대학을 졸업한 친구가 해 준 말이 있다. 음악에서 ‘악(樂)’은 한자로 ‘즐길 락’자이다. 그 위에 ‘풀 초(艹)’를 붙이면 ‘약(藥)’을 뜻하는 한자가 된다. 결국 음악가는 소리로 사람을 고치는 이들이다. 단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상식이 됐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달콤한 음악만 들을 순 없다. 우리의 마음을 고양시키는 ‘재미없는’ 음악도 필요한 이유다. 그래서 말러와 브루크너 전곡에 도전했다. 개개인의 마음이 건강해져야 사회도 건강해질 수 있다. 우리는 그만큼 음악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임헌정 서울대 작곡과 교수ㆍ전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의 말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정리=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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