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혜정 기자

등록 : 2017.10.28 09:00
수정 : 2017.11.05 21:09

[인물360˚] ‘국가가 관리한 성매매였다’…미군 기지촌 여성들

등록 : 2017.10.28 09:00
수정 : 2017.11.05 21:09

지난 1월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 소송 1심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에 참석한 여성들이 국가 배상을 촉구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1992년 10월 28일 오후, 경기 동두천시 미군부대 주변에서 살던 김성출(당시 68세)씨는 대문 옆 쪽방 문을 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던 문간방 아가씨가 끔찍한 모습의 주검이 돼 있었다. 머리에서 흐른 피는 시신 위에 뿌려진 하얀 세탁세제와 엉겨 붙어있었다. 얼굴은 구타를 당해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고 성기와 항문에 유리병과 우산대가 꽂혀 있었다. 미군 제 2사단 1연대 의무병 케네스 리 마클이 유흥업소 종업원 윤금이를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사건.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실태를 알린 일명 ‘윤금이 사건’이 25년 전 오늘 일어났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2014년, 기지촌 성매매여성 122명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정부가 기지촌 내 ‘미군 위안부’ 제도를 만들고 철저히 관리했으며 외화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해 인권을 침해했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미군 ‘위안부’였습니다”

‘위안부’는 일본 제국주의시기 성노예제의 피해자를 가리키는 용어다. 이 단어는 원래 가해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치욕적인 용어다. 조직적 성폭력을 ‘성적 위안’으로 포장했기 때문이다. 관련 시민단체와 한국 정부가 이 단어를 쓸 때 반드시 따옴표를 붙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엔 역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일본군 성노예(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고 지칭한다.

미군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이 자신들을 ‘미군 위안부였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와 동일시 하려는 것이 아니다. 1970년대까지 이 단어가 ‘군인을 위안하는 직업 여성’이라는 뜻으로 공공연하게 쓰였고, 이들의 인권침해 상황을 국가가 묵인하고 관리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1961년 서울시가 시행한 ‘유엔군 상대 위안부 성병관리사업’, 1957년 시행된 ‘전염병예방법시행령’등 공문서에서도 이들은 ‘위안부’로 지칭됐다.

1960년대 기지촌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948년 이승만 정권은 공창제 폐지령을 공포해 성매매를 금지시켰다. 박정희 정권도 1961년 ‘윤락행위 방지법’을 제정하고 이듬해 ‘인신매매 금지 및 타인의 매춘 행위에 의한 착취 금지에 관한 국제협약’에 가입했다.

이 같은 적극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기지촌’이 건재한 것은 앞뒤가 다른 정부의 태도 때문이었다. 국제협약에 가입한지 두 달 만에 박정희 정권은 보건사회부ㆍ법무부ㆍ내무부 합동으로 국내 총 104개소를 ‘특정윤락지역’으로 지정했다. 윤락행위 단속을 면제해준 특정윤락지역의 약 60%가 기지촌 인근 서울ㆍ경기 지역이었다. 정부는 특정윤락지역 지정 이유로 ‘윤락지역 격리 및 윤락여성의 새로운 삶 유도’ 등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를 ‘미군과의 관계 강화를 위한 정부의 전략적 고려’라고 분석한다.

정부는 또 1961년 8월 ‘관광산업 진흥법’을 제정해 미군 위안시설인 클럽 운영자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했다. 같은 달 10일 서울시는 미8군 서울지구 사령부와 한미 연석회의를 열어 ‘유엔군 위안부의 관계 및 유엔군 위안장소 설치문제’를 논의했다. 나아가 1963년 10월 19일 보건사회부는 식품위생법시행령 제10조 1항 36호를 통해 ‘주한 유엔군의 건전하고 명랑한 유흥과 휴식처로 제공하기 위해 접객부를 두는’ 특수음식점을 인정했다.

“나라가 개입한 기지촌에서 우리는 이용만 당했습니다”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관리와 통제가 가장 심해진 것은 1969년 아시아 지역 미군 감축 계획이 담긴 ‘닉슨 독트린’ 발표 이후다. 당시 한미합동위원회의 한국측 간사였던 김기조 전 외교안보원 명예교수는 “1971년과 1972년 캠프 험프리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 베스트 대령은 미군들의 휴식과 휴양을 위한 기지촌 서비스의 질 향상을 요구했다”며 “한국 쪽은 미군의 주둔을 원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거의 그대로 수용했다”고 밝혔다. 그렇게 시작된 관리는 ‘기지촌 정화’, 즉 강제 성병 관리였다. ( 기억할 오늘: 기지촌 정화대책 )

당시의 검진은 단순 질병관리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성병 감염이 의심되는 여성을 ‘낙검자(검진탈락자) 수용소’라는 곳에 감금했다. 낙검자 중에 실제 감염자 외 미군이 찍은 성병 감염자도 있었다. 김정자(가명ㆍ67)씨는 1982년 경기 동두천시 소요산에 위치한 낙검자 수용소에 2주간 갇혀 있었다. 그는 “일단 들어가면 화장실만 갈수 있었고 유치장처럼 쇠창살이 있는 방에서 다섯 명씩 자야 했다”며 “환자가 아닌 죄인 취급이었다”고 회상했다.

2013년 11월 당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유승희 의원은 국가기록원을 통해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결재한 ‘기지촌 정화대책’ 문건을 공개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부는 ‘하얀집’ 또는 ‘몽키하우스’(성매매 집결지를 일컫는 미국 속어)로 부르던 그곳에서 기지촌 여성들에게 치료 명목으로 과민성 쇼크 부작용 우려에도 불구하고 페니실린 주사를 놓았다. 박영자(가명ㆍ61)씨는 “주사를 맞고 거품을 문 채 쓰러진 아가씨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1978년 보건사회부가 법무부에 보낸 ‘페니실린 과민성 쇼크사고 처리에 대한 협조 요청’ 공문에 ‘일부 의사들이 페니실린 과민성 쇼크 사고 발생으로 주사행위를 기피하고 있어 국가 성병 관리에 지장을 초래하는 바, 면책해 주실 것을 협조 요청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공무원들이 기지촌 여성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애국교육’을 했다는 증언도 있다. 1962년 9월 한미친선위원회에서 기지촌 여성 전원에게 정신ㆍ미용ㆍ위생 및 영어회화 교육을 실시한다는 대책이 논의됐다. 이를 기지촌 여성 등록 단체인 ‘자매회’를 통해 실행했다. 김씨는 “자매회 교양 교육에 온 공무원들이 ‘미군에게 욕하지 말고 아가씨들이 서비스 좀 많이 해달라’, ‘미군을 위안하고 나라경제를 부강하게 하고 있으니 당신들이 애국자’라는 말을 늘 했다”고 술회했다.

2012년 7월 경기 평택 팽성국제교류센터에서 기지촌 여성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연극 '숙자 이야기' 공연을 마친 뒤 함께 기도하고 있다. 김주영 기자

지난 1월 서울중앙지법 민사22부(부장 전지원)는 기지촌 여성들의 국가대상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해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1977년 성병감염자 격리 수용을 규정한 ‘전염병예방법시행규칙’ 시행 전에 격리 수용된 여성 57명에 대해서만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기지촌 정화운동 등에 대해 지역환경 개선 및 성병치료 등 공익적 목적 달성을 위한 것으로 봤다. 재판부는 “원고들 가운데 생계유지의 어려움 때문에 성매매를 수단으로 삼은 여성들도 있어 보인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침해 주장에 반대하는 의견도 이와 같다. 그들이 스스로 기지촌을 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은 인신매매로 삶이 망가졌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열 다섯에 직업소개소에 속아 기지촌으로 팔려갔을 때 주변에 대부분 또래밖에 없었다”며 “십대인 우리를 도와주는 대신 직업소개소와 포주를 묵인해준 국가에 이용만 당했다”고 한탄했다.

지난 7월 유승희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이 문제와 관련해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및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하고 실태 파악을 촉구했다. 유 의원은 “여성의 인권유린을 막아야 하는 국가가 기지촌에 여성들이 불법 유입되는 것을 조장하고 묵인했다면 책임이 크다”며 입법 취지를 설명했다. 기지촌 여성들은 1심 판결에서 인정받지 못한 정부의 성매매 조장 책임을 다시 묻기 위해 항소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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