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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러브레이스

입력
2016.04.2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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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4월 22일

린다 러브레이스 주연 1972년 영화 'Deep Throat' 포스터
린다 러브레이스 주연 1972년 영화 'Deep Throat' 포스터

포르노 영화 ‘Deep Throat 목구멍 깊숙이’의 주인공 린다 러브레이스(Linda Lovelace)가 2002년 오늘 별세했다. 향년 53세. 무명 배우였던 그는 1972년 개봉한 저 영화로 할리우드 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지만, 그를 잊히지 않게 한 것은 영화 바깥의 진짜 삶이었다.

그는 1949년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 자서전 등을 통해 알려진 바 경찰관이던 아버지는 집안 일에 무감했고, 어머니가 오히려 엄하고 가부장적이었다고 한다. 가톨릭계 사립학교를 다닐 무렵 그의 별명은 미스 홀리(Holy)’였다. 남자 친구들과 한사코 거리를 두려 해서였다. 16세 무렵 아버지가 은퇴한 뒤 가족은 플로리다로 이사했고, 그는 부모 특히 어머니와 사이가 나빴다. 스무 살의 그는 어쩌다 아이를 낳았고, 어머니는 아이를 입양 보냈다.

이듬해 21세의 린다는 한 남자(척 트레이너)와 결혼해 독립했다.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돈핍쇼(peep show)용 8미리 하드코어 무성 포르노를 찍기 시작했고, ‘딥 스로트’에 캐스팅된다. 클리토리스가 목구멍 안쪽에 있다는 알게 된 주인공이 성적 권태를 극복하고 삶의 쾌락과 활력을 얻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는 신선한 시나리오와 새로운 캐릭터로 70년대의 문화적 성감대를 자극하며 시대적 사건이 됐고, 뉴욕타임스에 리뷰가 실리기도 했다. 제작비 2만5,000달러를 들인 영화는 6억 달러의 수익을 거뒀고, 린다는 플레이보이 에스콰이어 등 다양한 잡지 모델로 활약했다.

린다가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자서전 <Ordeal 시련>을 통해 밝힌 건 1980년이었다. 포르노는 모두 남편의 강압에 못 이겨 찍은 거였고 심지어 남편이 촬영장에 총까지 들고 와 위협한 적도 있었다는 이야기, 상습 가정폭력에다 매춘까지 강요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자서전 출간 이후 반 포르노 캠페인에도 가담했지만, 훗날 여성운동가들이 자신을 이용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자서전 내용에 대해서도 당시 함께 활동했던 이들 중에는 린다의 주장이 모두 진실은 아니라고, 그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고 주장한 이들이 있었다.

린다는 76년 재혼해 두 아이를 낳고 96년 이혼했고, 지병으로 숨지기 직전 ‘Leg Show’ 등 잡지에 속옷 모델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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