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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종말론을 버려달라” 영리한 하라리의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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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종말론을 버려달라” 영리한 하라리의 도발

입력
2017.05.1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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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를 통해 자신만의 종말론을 펼쳐보이는 유발 하라리. 김영사 제공
'호모 데우스'를 통해 자신만의 종말론을 펼쳐보이는 유발 하라리. 김영사 제공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유발 하라리 지음ㆍ김명주 옮김

김영사 발행ㆍ630쪽ㆍ2만2,000원

“유대인들의 특기는 종말론”이라 했던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농담은 유발 하라리에게도 딱 들어맞는다. 이 농담은 자유민주주의자이자 무신론자였던 러셀이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언한 마르크스와 그 제자들, 세상의 종말을 믿은 예수와 그 제자들을 겨냥해서 던진 것이다. ‘1+1=2’를 증명하기 위해 수백 쪽에 걸친 논증을 전개해야 했던 논리실증주의자 눈에, 입만 열만 온 세상의 종말과 영원한 천국의 도래를 떠벌리는 유대인은 참으로 기괴한 존재였을 게다.

알다시피 마르크스주의는 자기가 망했다. 곧 망하리라던 이 세상은 2,000여년 넘게 유지되고 있다. 솔직히 그 믿음의 실현이 2,000년 가량 유예됐다면, 믿음의 시효는 이미 오래 전에 만료됐다고 보는 게 옳다. 다만 이 기사를 읽은 지 5분 뒤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면서 ‘하늘의 심판’이 시작될 지 모르니, 만약의 천국행을 위해서라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보험은 들어두기로 하자.

‘영리한’ 하라리는 종말론의 이런 약점을 의식했던 게 분명하다. 신이 된 인간 ‘호모 데우스(Homo Deus)’를 내세워 ‘미래의 역사’를 그려 보이겠노라 했지만, 그래서 전작 ‘사피엔스’의 독자들은 손에 땀을 쥐며 그의 신작을 기다려왔건만, 결론적으로 그가 내놓은 대답을 한 문장으로 줄이자면 “내가 말하는 것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 진짜 그리 될 줄은 나도 잘 모르겠다”다. 540여쪽에 이르는 책 치곤 너무 무책임한가.

좀 덜 무책임하게 보이는 버전을 고르자면 “우리 미래는 우리 하기 나름이다” 혹은 “바짝 정신 차리고 잘 해야 한다” 정도다. 그런데 이런 건 선생님, 영업소장님, 사장님들이 늘 입에 달고 다니던 말씀 아닌가. 기대치가 높았던 독자들이라면 실망했다는 탄식을 한껏 뱉어놓을 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솔직하다는 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상당수의 자기계발ㆍ경제경영서들, 혹은 저명한 논객들처럼 자기만큼은 남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애쓰느라 스스로 망가지는 무리수는 피했으니까.

하라리의 이런 ‘영리함’은, 종말론의 약점을 분명히 의식하면서도 종말론적 요소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발군의 스토리텔링 능력에서 빛난다.

1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 2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의 의미를 부여하다’에서 인류 역사에 대한 하라리의, 예의 그 매혹적인 압축 요약 능력을 만끽할 수 있다. 원시 종교에서 좀 더 현대화된 종교로의 이동, 그리고 과학의 등장, 뒤이은 인본주의의 물결 등을 차분하게 해설해준다. 20세기 현대사를 인본주의의 세갈래, 자유주의 인본주의ㆍ사회주의 인본주의ㆍ진화론적 인본주의간 각축전으로 설명하는 부분은 흥미롭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라 이름 붙였지만 실제 내용은 다름 아닌 우생학, 즉 나치의 논리다. 좌우 양쪽의 협공으로 소멸한 것처럼 보였던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그러나 생명과학 기술의 발달로 다시 등장했다. 돈이 있다면, 유전자 조작을 통해 ‘좀 더 나은 당신’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속삭임이 곳곳에 등장한다.

유전자 조작 기술은 나날이 발달하고 있다. 이 신흥 '기술종교'의 부흥 앞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유발 하라리의 질문이다. 김영사 제공
유전자 조작 기술은 나날이 발달하고 있다. 이 신흥 '기술종교'의 부흥 앞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유발 하라리의 질문이다. 김영사 제공

문장도 좋다. ‘불멸’을 두고 “기술적으로 오만할 지 몰라도, 관념적으로는 오래된 것”이라 써둔 건 상상력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해준다. ‘인류세’라는 시대 설정, ‘호모 데우스’라는 작명을 두고 “다른 동물에 대해서 인간은 오래 전에 신이 되었으나 이를 깊이 생각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다지 공정한 신도, 자비로운 신도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에선 동물보호론자들이 쌍수를 들고 환호성을 지를 법하다. “허구는 꼭 필요하다. 하지만 이야기가 단지 허구임을 잊을 때 우리는 실제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며, 그 때 우리는 ‘기업을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또는 ‘국익을 보호하려고’ 전쟁을 시작한다” 같은 문장은 좌파들 입술에서 절로 휘파람이 나오도록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과학도 종교도 진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둘은 쉽게 타협하고 공존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협력도 잘한다” 같은 문장은 과학사회학의 명제처럼 들린다. 기대치를 조정한다면 유쾌하게 읽어내려 갈 수 있는 재치 넘치는 문장들이 곳곳에 넘친다.

3부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에서부터 ‘하라리표 종말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상징되는 알고리즘의 발달은, 아예 인본주의 자체를 흔들어버린다. 알고리즘이 정보를 수집, 판단, 결정하면 인간은 그 말을 들어야 한다. “사실 5,000년 전에도 수메르 땅 대부분의 소유자는 엔키와 이난나 같은 상상 속의 신들이었다. 신이 땅을 소유하고 사람을 고용할 수 있다면 알고리즘은 왜 안 되는가.”

인간이 애써 마련한 피난처 가운데 하나가 ‘예술’이다. 설마 했건만, 이마저도 깨졌다. 미국 음악학자 데이비드 코프가 7년의 시간을 투자해서 만든 EMI(음반사가 아니라 음악지능실험ㆍExperiments in Musical Intelligence)는 가동에 들어가자마자 바흐풍 합창곡을 하루에 5,000곡 생산했다. 인간의 결투 신청이 들어왔다. 피아니스트가 바흐, EMI, 스티브 라슨 3명(?)의 곡을 연주한 뒤 청중 평가를 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청중들은 EMI의 곡을 바흐의 곡으로, 바흐의 곡을 라슨의 곡으로, 라슨의 곡을 컴퓨터의 곡으로 판정했다. 하라리는 한국 신문사의 말단 사건기자 마냥, 이런 처참한 패배의 기록들을 열심히 끌어 모은다.

알고리즘 시대의 주기도문은 이진법이다. 알고리즘이여,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이까. 김영사 제공
알고리즘 시대의 주기도문은 이진법이다. 알고리즘이여,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이까. 김영사 제공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우리는 엔지니어에서 칩으로, 그런 다음에 데이터로 전락”할 일뿐이요, 결국 “세차게 흐르는 강물에 빠진 흙덩이처럼 데이터 급류에 휩쓸려 흩어질”일 뿐인가. 억울하고 분할 것 없다. 진화의 눈으로 보자면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모든 동물들에게 했던 일”의 반복일 뿐이다. 그래선 안 된다는 주장 자체가 낡은 인본주의의 고정관념이다. 그저 전능하신 AI가 굽어살피길 바랄 뿐.

이쯤에서 하라리는 돌아앉아 딴소리를 한다. “이 책에서 제시한 시나리오는 예언이라기보다는 가능성으로 받아”들이라고. “이런 가능성 가운데 어떤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런 가능성이 실현되지 않도록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종말론으로 실컷 겁줘놓고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렸다, 라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것인가. 힌트는 사실 책 초반부에 나온다. 하라리는 마르크스주의 덕분에 자본주의가 살아남았다는 역설을 기억하라면서 이렇게 써뒀다. “이것이 역사 지식의 역설이다. 행동을 바꾸지 못하는 지식은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행동을 바꾼 지식은 곧 용도폐기된다.” 하라리는 자신의 책을 용도폐기해달라고, 아주 간절히 요청하는 셈이다. 무책임보다는 좀 나아 보인다. 역시 영리하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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