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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없는 모국어”를 향한 통렬한 조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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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없는 모국어”를 향한 통렬한 조롱

입력
2016.03.1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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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인이 시집 ‘피어라 돼지’와 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를 동시에 출간했다. 문학동네 제공
김혜순 시인이 시집 ‘피어라 돼지’와 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를 동시에 출간했다. 문학동네 제공

마녀의 삶은 피곤하다. 마녀의 아름다움에 홀린 이들은 자신이 그 부정(不淨)함에 끌린 것도 모르고 정숙해지면 사랑해주겠다고 꼬드긴다. 부정과 정숙의 구분을 공유하지 않는 마녀는 그 말을 이해조차 못하고, 외계의 언어로 사고하는 자를 기다리는 건 늘 뜨거운 장작불이다. ‘마녀 시인’ 김혜순이 시집과 시산문집을 동시에 출간했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는 2014년부터 문학동네 인터넷 카페에 연재한 시산문을 묶은 것,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피어라 돼지’는 3년만의 시집이다.

시인은 카페 연재 당시 ‘쪼다’라는 닉네임으로 본명을 감췄다. 글 속에선 ‘않아’라는 3인칭을 통해 말한다. ‘않아’는 자신이 마녀형 시인으로 분류되는 걸 잘 알고 있다.

“명명은 명맥이 길다. 명명은 정체성의 낙인을 찍는 방편이다. 어느 평론가는 거기서 또 나눈다. 마녀형 여성시인, 무녀형 여성시인, 창녀형 여성시인, 소녀형 여성시인, 모성형 여성시인, 남성시인들은 그렇게 분류되지 않는다. 호스트형 남성시인, 마술사형 남성시인, 박수형 남성시인, 소년형 남성시인, 군인형 남성시인, 부성형 남성시인. 그들 앞에는 형용사나 직업, 기질 형을 붙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시인이다. 않아는 주로 마녀형으로 분류된다”

마녀란 말에 거부감을 표하지만 시인의 음성은 장작불에 막 올려졌을 때처럼 찢어져 울리지 않는다. 올해로 시력 35년. 이제 장작불이 뜨끈하게 느껴지는지 한때 뜨거웠던 혐오와 경멸을 시인은 이제 권태롭게 노래한다. ‘않아’는 “도마에 칼이 탁탁 부딪히는 소리가 제일 듣기 좋다는 어떤 어머니의 자식들을” 싫어하고 “잠언 선생님들이 내지르는 교훈에 질렸”으며 “불을 대로 불어터진 젖꼭지가 자갈길에 쓸”리며 걷는 소처럼 남은 생을 견딘다. 여전히 끓는 욕망은 “여자들만의 문자”를 찾는 일. 자신을 마녀로 분리수거해버린 “반성 없는 모국어 사전” 대신 새로운 언어의 대륙을 발견하는 일을 스스로에게 숙제로 남겨둔다.

“여자들만의 문자가 있던 나라가 있었다. 남자들은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었다. 더 큰 나라가 쳐들어와서 여자들의 글자를 다 태워버렸다. 분홍 자수 실로 겨우 남은 몇 글자를 수놓은 베갯잇을 샀다. 아기발처럼 안아보았다. 여자들만의 문자로 편지를 써보고 싶다. 글의 집을 지어보고 싶다.”

시집에선 시인이 찾는 여자의 문자, 분홍실로 수놓은 낯선 문자들이 곳곳에 발견된다. 언어의 소유권으로 표상되는 세상의 권력을 시인은 무용하다고 비웃는다.

“국어의 의문문은 왜 까로 끝나나요?/물어봐야 소용없는 국어사전 고양이 말씀//이 고양이랑 자주 놀면/언어의 파동도 음운의 미립자도 모르게 됩니다/사전이나 넘기면서 이 단어 저 단어/적어주는 대로 읽어대는 코리안 앵커처럼/이해도 피해도 없는 종잇장에 박힌 평평한 말씀”(‘국어사전 아스퍼거 고양이’ 중)

15편의 연작시를 한데 꿴 장시 ‘돼지라서 괜찮아’는 2011년 초 구제역 파동으로 연일 수백만 마리의 돼지가 살처분됐던 기괴한 풍경에서 태어났다. 억울한 모든 타자의 몸 속으로 기어 들어가 “엿 같다” 외치는 마녀의 육성이 통렬하다.

“기분이 엿 같아 본 적은 없으세요?/도와달라는 소리 들어본 적은 있나요?/왜 나보고 자꾸만 나를 버리라는 거예요?/엿 같다니까요? 정신과 의사도 아니면서/그렇다고 경찰도 아니면서/이 세상은 후손 거라면서 왜 자꾸 셋방살이하는 기분이 들게 해요?”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김혜순 시인의 산문집(왼쪽)과 시집.
김혜순 시인의 산문집(왼쪽)과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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