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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시간 빈곤자들의 도시

입력
2017.06.0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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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만년 1,2위 최장노동시간 국가 대한민국, 이 땅에는 야근과 주말 근무, 돌발노동에 시달리는 시간빈곤자들이 넘친다. 게티이미지뱅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만년 1,2위 최장노동시간 국가 대한민국, 이 땅에는 야근과 주말 근무, 돌발노동에 시달리는 시간빈곤자들이 넘친다. 게티이미지뱅크

말문이 턱 막힐 때가 있다. 제때 요긴한 질문을 던지는 게 기자의 마땅한 능력이라면 점점 질문력(質問力)이 늘어야 할 텐데, 되레 자꾸 입술만 앙다물게 되는 것이다. 취재원의 참담한 사연에 질문 대신 자꾸 혼잣말만 입가에 맴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몇 해 전 요양보호사 L씨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주간, 야간, 휴무 3교대 근무를 하는 그녀는 하루 8~15시간을 4년째 주말 없이 일했다. 야간 근무 시간만 120시간, 한 달 근무시간은 240시간에 달했다. 치매환자의 대소변 수발부터 청소까지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받는 급여는 수당을 더해 월 최대 160만원이다. 야간에도 1인당 10명에 이르는 환자를 돌봤지만 돌아온 건 수당 대신 꼼수였다. 계약서 상 야간 3~6시간을 휴게ㆍ수면시간으로 정해놓고, 정작 쉬다가 환자가 다치는 날엔 책임을 묻는 식으로 내내 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환자를 수시로 업고 들다 골반 뼈가 부러졌는데도 워낙 바쁘고 피곤해 만성근육통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도 L씨는 분노하기보단 초조해했다. 자신이 놓인 고통의 세계를 최대한 자세히 알리고 싶은 마음과 혹여 닥쳐 올 해고 위협에 대한 불안이 그의 얼굴에서 어지럽게 교차했다. 그에게 취재원 보호를 다짐하며 다시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한 달간 한 인간의 온 힘을 갈아 넣은 노동의 값이 160만원일 수는 없는데도, 그의 급여도 장시간 노동도 현행법 상 불법은 아니었고, 수당을 아끼려는 각종 편법까지 횡행했다. 그래도 노동자들은 그 일자리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고, 여기서도 밀리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불안감에 ‘내 시간 기꺼이 다 내어 드리리’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없기에 탈주는 불가능하고, 시간이 없기에 육아 비용 지출도 컸다. 한편으론 돈이 없기에 있는 시간이라도 사용자에게 다 내주며 버텨야 했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L씨뿐만이 아니다. 청소노동자, 트럭운전사, 택배기사, 집배원, 마케터, 회사원 등 도처에 쉬는 시간보다 일하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긴 이들이 넘쳤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2015년 한국 전체 임금노동자 중 42%(930만명)이 이런 시간빈곤자다. 일하느라 먹고, 입고, 씻을 시간조차 없는 시간빈곤자들의 도시는 그렇게 앓는 빛을 뿜고 있었다.

불이 꺼지지 않는 한국의 도시들은 자세히 볼수록 괴기하다. 야근으로 배추처럼 절여진 신입사원은 “이거라도 안 하면 진짜 죽을 것 같아서” 밤 11시 러닝머신 위를 달린다. 습관적 희생으로 잠도 취미도 잃은 걸 뒤늦게 깨달은 과장은 늦은 퇴근 후 향한 골프연습장에서 작은 위로를 찾는다. 탈주를 꿈꾸는 이직 희망자는 24시 카페에서 공부하며 뜨거운 카페인을 들이켜고, 최저시급의 청년들이 그에게 새벽까지 커피를 내주고 그릇을 닦는다.

다행히 새 정부는 제1호 공약인 ‘일자리 확대’ 계획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으로 희망을 불어넣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 포괄임금제 규제, 노동시간 특례업종 축소도 약속했다. 넘을 산이 많은데도, 남달리 의욕적 모습에 이번에는 일의 양도 질도 개선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기대가 자꾸 커진다. 살결 냄새 나는 저녁을 모조리 잃어버린 이들의 육성이 떠올라서다.

“아이 커가는 걸 보면서도 정규직으로만 일하면 바랄 게 없겠어요.”(요양보호사 L) “돈 벌려고 태어난 건 아닌데, 살아남으려 종일 돈만 벌어야 하는 일과를 언제쯤 끝낼 수 있을까요.”(대기업 과장 S) “누가 그러더라고. 선미의 이 노랜 딱 노동요라고. ‘24시간이 모자라. 네가 야근을 하면, 나한테도 시키면. 24시간이 모자라. 애를 겨우 재우고, 남은 빨래를 하면.’ 어때, 서글프지.”(직장맘 C)

앞서 진전을 이룬 예는 많다. 대부분 노동자가 야근과 휴일근무 없이 하루 6~7시간 일하며, 저녁엔 가족과 온기를 나누며 취미를 즐기고, 이따금 하는 추가 근무는 한데 모아 1달간의 연차휴가로 보상받아 행복하게 일하고 생산성을 제고하는 세상. 그런 나라들이 지구 상엔 실존한다. 그것도 많이. 이런 인간다운 삶을 먼 유럽 땅의 풍문으로만 보고 듣고 살기에, 이 땅의 시간빈곤자들은 그간 너무나 열심히 살았다.

김혜영 기획취재부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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