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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면접장에서는 생육신이 돼라

입력
2018.04.04 14:16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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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집권 3년차이던 2015년, 공무원ㆍ민간ㆍ공기업 등의 신입사원 채용 면접장은 ‘사상 검증’으로 흉흉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민주노총이 없었다면 국민소득 3만 달러 넘어 선진국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어떤 신문을 읽느냐” “정부가 국정화 교과서를 왜 하려는 것 같은가” “청년실업 문제의 책임이 누구한테 있느냐”(박수지 기자, ‘사상검증 면접’영혼을 팔까, 미꾸라지 답변할까…’, ‘한겨레’ 2015.12.24)

사상검증에 맞서는 가장 오래된 방법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휘브리스(hybris)’를 발휘하는 것이다. 영어 사전은 이 단어를 ‘오만’ ‘교만’ ‘지나친 자신’으로 간략히 풀이하고 있고, ‘종교학 대사전’은 그보다 더 자세하지만 이 단어에 대해 부정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고대 그리스 윤리사상의 근저를 이루는 개념. 번영의 극치에 있는 인간이 행운에 취하거나 자신의 힘을 과신해서 때로는 신에 대해서조차 나타내는 건방진 언동. 이런 인간의 신분을 망각한 오만이나 교만은 반드시 천벌을 부르며, 사람을 파멸시킨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소포클레스의 희곡에 나오는 많은 주인공은 휘브리스를 부리다가 비극을 맞이했다.

반면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민음사,2004)에서 휘브리스를 예찬했다. “‘끝에까지’라는 말은 여전히 어떤 한계를 정의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한계, 경계가 가리키는 것은 사물을 하나의 법칙 아래 묶어두는 어떤 것도, 사물을 끝마치거나 분리하는 어떤 것도 아니다. 거꾸로 그것은 사물이 자신을 펼치고 자신의 모든 역량을 펼쳐나가기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휘브리스는 이제 단순한 비난의 표적이 아니다.” 들뢰즈는 휘브리스에 ‘끝까지 가보기’라는 새로운 의미를 추가하면서 이 단어를 긍정했다. 끝까지 가봐야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것과 우리에게 허용된 자유의 범위를 드러낼 수 있으며, 그 끝은 항상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이 방법의 난점은 당신이 사육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상검증에 대응하는 두 번째 방법은 그리스 비극보다 훨씬 뒤에 생겨났다. 지동설을 펼치다가 종교재판소에 소환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 다음, 법정 문을 나서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다. 좀 더 근대에 가까운 이 방법은 사상검증을 조롱하고 교란한다. 혹자는 과학적 발견은 번복해도 달라질 것이 없지만, 신념은 번복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반박한다. 이런 비판은 과학자를 시민의 대오에서 열외 시킬 뿐 아니라, 자신의 과학적 신념을 끝내 고수하다가 화형을 당한 조르다노 브루노를 어리석었던 사람으로 만든다.

2015년 12월 9일,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사상 검증에 대면하게 될 면접자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지위의 우위를 악용해서 특정한 성향의 세계관을 강제하는 사람이 있다. 이걸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저는 거짓말을 할 것을 권한다. 전체주의자들이 사람들의 사상을 감시하고 통제할 목적으로 특정한 대답을 강요할 땐 거기에 맞춰주면 된다. 나쁜 놈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죄가 아니니, 도덕적 열패감을 절대 느낄 필요가 없다. 그들을 속이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일단 합격한 뒤 조직에서 일하다가 비리를 보면 익명으로 고발하라.”

최근 각종 신입사원 채용 면접장에서 여성 면접자에게 “요새 미투 운동이 화제인데 어떻게 생각하냐” “동료가 성폭행을 당한다면 어떻게 대처할 거냐” “조직을 위한다면 성폭력을 당해도 얘기하지 않을 것인가”와 같은 신종 사상검증이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한소범 기자, 성폭력 땐 어떻게 대처?…면접자 압박하는 ‘미투’ 질문, ‘한국일보’ 2018.3.15) 면접장은 토론장이 아니다. 일단 합격하고 나서, 훗날 그 상사가 성희롱을 하면 보기 좋게 고소하라. 더는 저런 검증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질문 자체를 낙후시키라. 면접관이 이중적이면 면접자는 삼중적이 되어야 하고, 권력자가 삼중적이면 피권력자는 사중적이 되어야 한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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