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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로 내몰린 이들에게 집을 주고 가족을 주다

입력
2017.01.14 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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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지나 콰트로키

에이즈 발병 초기였던 1980년대는 HIV 감염자와 환자에게 지금보다 더 가혹했다. 사회는 그들을 내쫓고 문을 닫아 걸었다. 그들은 병으로 죽고 굶주려서도 죽었지만, 먼저 절망으로 죽어갔다. 뉴욕 베일리하우스는 그런 홈리스 에이즈 환자들을 위해 문을 열고 따듯히 맞이해준 최초 시설이었다. 베일리하우스의 원년 이사를 거쳐 CEO로서 25년을 이끌어온 지나 콰트로키(오른쪽)가 별세했다. 사진은 2014년 UCLA와 존슨앤존슨사가 수여하는 지역보건증진프로젝트(CHIP)상 시상식장의 콰트로키. Baileyhouse 홈페이지.
에이즈 발병 초기였던 1980년대는 HIV 감염자와 환자에게 지금보다 더 가혹했다. 사회는 그들을 내쫓고 문을 닫아 걸었다. 그들은 병으로 죽고 굶주려서도 죽었지만, 먼저 절망으로 죽어갔다. 뉴욕 베일리하우스는 그런 홈리스 에이즈 환자들을 위해 문을 열고 따듯히 맞이해준 최초 시설이었다. 베일리하우스의 원년 이사를 거쳐 CEO로서 25년을 이끌어온 지나 콰트로키(오른쪽)가 별세했다. 사진은 2014년 UCLA와 존슨앤존슨사가 수여하는 지역보건증진프로젝트(CHIP)상 시상식장의 콰트로키. Baileyhouse 홈페이지.

1969년 6월 뉴욕 그리니치빌리지 게이클럽 ‘스톤월 인’에서 경찰의 가혹행위에 분노한 게이들은 ‘폭동’으로 힘을 얻고, 또 일주일 뒤 ‘게이 권력(Gay Power)’의 깃발을 내 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뉴욕과 로스엔젤레스에서 사실상 최초의 LGBT 프라이드 행진을 시작했다. 그들이 ‘게이 권력’으로 쟁취하려던 건 간섭이나 차별 없이 사랑하며 살 자유였다. 그 아름다운 권력은, 다시 말해 사랑은, 몇몇 대도시의 옹색한 공간에서 시작돼 80년대 초까지 더디지만 꾸준히 영역을 넓혀갔다.

그들의 사랑은 다수자들이 보기에 급진적이고 과격한 면이 있었다. 성행위의 대상과 방식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히피들의 그것과는 또 다른, 제도적ㆍ부르주아적 사랑과 결혼을 조롱하며 가족ㆍ가정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던 이들이 있었고, 또 적지도 않았다. 게이 작가 마이클 커닝햄의 초기작 ‘세상 끝의 사랑 A Home at the End of the World’에는 그 무렵 그들의 생각 일부를 드러낸 구절이 나온다.

“우리 부모들의 인생을 망쳐버린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사랑은 우리 부모들에게 집을 사면서 대출받은 돈을 갚고 집수리를 하며 사는 인생을 가져다 주었고, 보잘것없는 직장에서 일을 하며(…) 슈퍼마켓의 형광등이 켜진 진열대 사이를 돌아다니는 인생을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다른 사랑을 원했다. 우리가 원하는 사랑은 우리가 지닌 인간적 연약함을 잘 알고 그것을 용서해 주면서도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자존심을 작게 축소시켜 버리지 않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이 가능할 것 같았다. 우리가 서두르지 않는다면, 겁에 질리지 않는다면, 자극적인 도전과 따스함을 함께 갖춘 사랑이 나타날 것 같았다. (…) 그런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섹스를 했다. 우리는 흥청대는 새 시대가 시작되는 시기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김승욱 옮김, 생각의 나무, 291~292쪽)

“흥청대는 새 시대”가 막 열리는가 싶던 그 무렵, 1981년 7월 3일 뉴욕타임스에는 ‘Rare Cancer Seen in 41 Homosexuals’라는 제목의 그리 길지도 않은 기사 한 꼭지가 실렸다. 암과 유사하지만 발병 후 급속하게 병증이 악화하는, 뉴욕과 캘리포니아의 동성애자 41명의 신종 질병 사례를 소개하는 기사. “원인도 전염 메커니즘도 알 수 없지만, 증상으로는 피부에 반점이 생기며…” 어쩌고 하는 그 기사는 뉴욕의 피부 종양학자 앨빈 프리드먼 키언(Alvin Friedman- Kien)의 말을 인용 “아직 동성애자 커뮤니티 바깥이나 여성들에게서는 발병했다는 보고가 없다”며 감염 예방의 최선책을 넌지시 암시했다.

하지만 ‘카포시 육종 Kaposi’s Sarcoma’, 혹은 ‘게이 암 gay cancer’이라 불리던 그 병에 걸린 이는 그 해에만 뉴욕 162명, 캘리포니아까지 포함하면 270명에 달했고, 그 중 약 절반인 121명(뉴욕 74명)이 해를 넘기지 못했다. 그건 쓰나미의 첫 파도일 뿐이었다. AIDS 합병증으로 숨진 이는 이듬해 853명으로 늘어났고, 83년에는 1,292명, 84년에는 3,665명…. 80년대 AIDS 공포가 그렇게 시작됐다.

국가는 우왕좌왕했고, 공동체는 패닉에 빠져들었다. 사회는 히스테리로 위축돼갔고, 게이 커뮤니티는 괴질의 온상인 양 배척당했다. 게이커뮤니티도 움츠러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화 중 등장하는 ‘누구 소식 들었어?’같은 말은 대부분 부고로 이어졌고, 각자는 풍문 속 이름과 자신의 옛 연애사를 따져보며 불안해하곤 했다. 잡지 ‘Poz’의 발행인 신 스트러브(Sean Strub)는 83년 5월 친구들과 저녁을 먹다가, 마주 앉은 친구의 왼쪽 귀볼 뒤에 자줏빛 반점을 발견하고는 전전긍긍했던 일을 소개했다. 검진을 받고 왔다는 친구에게 “의사가 그 반점도 봤어?”라고 묻자 화들짝 놀라 화장실로 달려갔다가 사색이 되어 돌아온 이야기.(매거진 ‘New York’2014.5.29) 그 친구의 근황은 알려진 바 없지만, 스트러브는 85년 HIV감염 진단을 받았다.

미국질병예방센터(CDC)가 음식물이나 물 공기 일상적인 접촉을 통해서는 HIV가 전염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표한 건 비교적 이른 83년 9월이었다. 2년 뒤인 85년 9월, 혈우병을 앓던 인디애나 주 10대 소년 라이언 화이트(Ryan White)가 혈액제제를 통해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이 밝혀진 뒤 등교를 거부 당했다. 그 해 뉴욕 시에서는 거꾸로, 에이즈 진단을 받은 한 아이의 학교 재학생 1,100명 가운데 944명이 등교를 거부하는 일이 빚어졌다. 그들은 ‘Time’의 제목처럼 ‘새로운 불가촉민 The New Untouchables’이었다. 직장에서 쫓겨났고, 가족들로부터 외면 당했고, 연인에게 버림받기도 했다. 미국 장의사협회조차 83년 6월 회원들에게 에이즈 희생자의 시신 장의서비스를 거부하라는 안내문을 보냈다.

동성애자(그리고 감염자)들은, 질병과 공포와 차별, 삼중의 싸움을 벌이는 한편, 국가를 상대로 질병 연구 및 정보 공개와 예방 교육ㆍ홍보를 촉구했고, 지자체를 상대로 감염자 치료와 보호를 요구했다. 그리고, 국가와 지자체가 해내지 못하는 일들을 스스로 나서 해내야 했다. 유력한 HIV 감염자 인권단체로 선구적 게이 인권운동가 레리 크레이머(Larry Kramer) 등이 조직한 ‘GMHC(Gay Men’s Health Crisis)’가 82년 1월 출범했다. 하루하루 속절없이 친구들을 잃어가던 그들은 “모든 게, 모든 게, 너무 적고, 너무 늦다. 우리의 침묵이 서로를 살해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말했다.(nymag.com) 그들은 모금운동을 벌였고, 질병 정보와 예방책 등을 조사해 게이 커뮤니티에 알렸다.

1989년 9월 뉴욕 증권거래소 광장에 드러누운 'ACT-UP' 'GMHC' 등 동성애자 인권단체 활동가들의 시위. liberationschool.org
1989년 9월 뉴욕 증권거래소 광장에 드러누운 'ACT-UP' 'GMHC' 등 동성애자 인권단체 활동가들의 시위. liberationschool.org

당시 뉴욕 시장이던 에드 코치(Ed Koch)가 게이 커뮤니티 대표자들과 첫 공식 미팅을 가진 건 83년 4월이었지만, 뉴욕 시의 초기 AIDS 대응은 참담한 수준이었다. 지난해 책으로도 출간된 2002년의 다큐멘터리 ‘How to Survive a Plague’의 제작자 데이비드 프랜스(David France)는 2013년 코치 별세 직후 ‘New York’에 기고한 글에서조차 고인을 온전히 용서하지 못했다. “숱한 동성애자들이 죽어나가는 동안 그는 범부처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연락관을 지명했지만 아무런 권한도 자원도 배정하지 않았다. 84년 코치의 뉴욕시가 에이즈 대책에 들인 예산은 2만4,500달러에 불과했다.(…) 휴대폰도 인터넷도 드문 시절이었다. 뉴욕타임스도 ‘게이’라는 단어를 쓰길 꺼려했고, 게이 커뮤니티 신문 판매량은 고작 6,000부에 그치던 때였다. 코치는 (물론 바이러스를 멈출 수는 없었겠지만) 리더십을 보여줄 수는 있었다.” 프랜스는 “병원 스태프들조차 에이즈 환자 접촉을 꺼려 음식 쟁반을 병실 바깥에서 밀어 넣고, 붕대나 침대 시트 교체를 거부하는 간호사도 있었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같은 이야기들. 나는 그 실상을 기자회견에서 코치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버럭 화를 내며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고만 말했다.” 하원의원 출신 3선 뉴욕시장(1978~89 재임) 코치는, 본인은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내내 ‘클로짓 게이’라는 의심을 받던 독신 정치인이었다.

그렇게 세상이 온통 문은 닫아 걸던 그 시기, 병들어 길바닥에 쫓겨난 그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준 이들이 있었다. 83년 뉴욕에서 출범한 ‘AIDS 자원센터(AIDS Resource Center)’였다. 봉사자들은 미드 마이너 베일리 경(Mead Miner Bailey) 경 등 독지가들의 후원을 받아 86년 첼시와 그리니치 빌리지에 몇 채의 아파트를 임대, 에이즈 홈리스들에게 쉴 곳을 제공하고 간호하며 먹을 것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미국 최초의 에이즈 환자 집단거주시설 ‘베일리 하우스 Bailey House(초기 명칭은 Bailey- Holt House)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들은 에이즈 환자의 생존을 위해서는 특효약보다 더 시급한 것이 거처라 여겼다. 한창 임상실험 중이던 AZT(아지도티미딘) 등 신약이 식품의약품안전청(FDA)의 승인을 받을 때까지 우선 환자들이 버틸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구구절절 사연이 많지만 어쨌건, 그들 덕에 수많은 감염자들이 그 ‘눈먼 자들의 시대’를 버텨, 이제 에이즈가 의학적 사형선고가 아닌 당뇨병 같은 만성 질환의 하나로 맞서볼 만하게 돼온 지금까지 살아낼 수 있었다.

베일리하우스의 CEO를 맡아 만 25년을 이끌어온 지나 콰트로키(Regina ‘Gina’ Quattrochi)가 지난 해 12월 13일 별세했다. 향년 63세.

그는 1953년 4월 22일 뉴욕 퀸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뉴욕주 대법원 관료였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그는 가톨릭학교를 거쳐 75년 올버니 뉴욕주립대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78년 올버니 로스쿨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한 로펌에서 기업 노동법 변호사로 일하다 80년대 들어 뉴욕주 뇌성마비협회와 간호사협회 법률자문 변호사로 일했다. 그가 베일리하우스의 이사가 된 건 86년이었다. 그의 사생활(성 지향 포함)은 거의 알려진 바 없지만 그도 여러 명의 친구를 에이즈로 잃었고, 그러면서 에이즈 환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91년 베일리하우스의 대표(CEO)가 됐다. 에이즈나 동성애자와 엮이기조차 꺼려했던 코치 재임기의 뉴욕시와 뉴욕주, 보건 당국과 연구기관과 거대 제약회사들을 상대로, 또 차별과 편견의 사회까지 상대로 싸움도 하고, 토론도 하고, 설득도 하며, 예산을 타내고, 기부금을 모금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2008년 5월 올버니 로스쿨 매거진 ‘Issue’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법률가로서 어지간한 건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조직 특히 에이즈환자를 보살피는 조직을 운영하는 데는 완전히 초보였다. 나는 바닥서부터 배우며 그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완전 초보였던 그가 CEO가 된 데는 그의 ‘전투력’이 주효했을 듯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익힌 가라데로 45세에 검은띠를 딴 유단자였다. “난타전(full contact fighting) 취향의 인파이터”라고 자신을 소개할 만큼 저돌적이었던 그는 힘든 시기의 조직으로선 듬직한 전위였을 것이다. “민첩성과 기술보다 힘과 지구력으로 승부를 거는 편이었다. 시민운동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때로는 외교적인 접근이 더 나을 때도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베일리하우스는 명사들이 기증한 물품을 팔아 기금을 모으고, 앤더스 쿠퍼(Anderson Cooper) 쏘스턴 카예(Thorsten Kaye) 등 유명인과의 점심 식사권 등을 경매로 판매하기도 했다. 취임 초기 연 예산 350만 달러였던 베일리하우스는 2016년 말 현재 1,800만 달러 규모로 커졌고, 약 1,800명의 감염자 및 발병자 등에게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08년 인터뷰에서 그는 처음 CEO가 되던 때를 환기하며 “ 당시 나는 17년 뒤인 지금도 이 자리에 있을 줄 몰랐다”고 말했다. “이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전투 양상이 바뀌었고 정치적 환경이 달라졌지만, 에이즈는 뉴욕을 포함한 미국의 여러 지역과 지구에서 여전히 난폭하게 전염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2001년 ‘Philanthropynewsdigest’ 인터뷰에서 에이즈 문제가 미국 보건 지상과제라 여기는 이의 비율이 1995년 44%에서 2000년 26%로 감소한 것을 두고 “그 함의는 무척 실망스럽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건 우리의 모금에도, 공공정책 면에서도, 에이즈 예방과 치료에도 재앙이다. HIV는 여전히 방심할 수 없고, 방심해서는 안 되는 바이러스다”라고 말했다. 물론 그 무렵의 에이즈는 80년대와 판이했다. 96년 유엔 에이즈 프로그램이 가동됐고, FDA의 승인을 받은 가정용 진단키트가 발매됐다. 항레트로바이러스 요법의 효능이 알려지면서 HIV 감염자의 에이즈 발병률도 점차 낮아지고 있었다.

콰트로키가 강조하려던 건 에이즈 대응력의 성 인종 지역 격차였다. 흑인, 특히 여성과 빈곤층 감염자들의 열악한 상황에까지 사회가 둔감해지는 것을 그는 경계했다. 2011년 본격화한 ’30 For 30 캠페인’ 즉, HIV감염 여성과 트랜스젠더들의 발병 예방 및 치료 격차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캠페인의 주도자 중 한 명도 그였다. ‘30 For 30’은 에이즈 공포가 시작된 지 30년이 됐고, 여성 환자 비율이 약 30%인 점에 착안해 붙인 이름. 그 가운데 약 80%가 흑인과 라틴계다. 콰트로키는 저 캠페인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 문제의 심각성을 호소했고, 전문가들과 함께 잠비아 등 남아프리카와 쿠바 등지를 돌며 예방ㆍ치료 정보 등을 홍보했다.

2014년 쿠오모 뉴욕 주지사는 2020년까지 HIV 감염자를 연간 750명 이내로 줄이기 위한 야심찬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콰트로키의 합류를 청했다. 콰트로키가 다발성골수종(multiful myeloma, 혈액암의 일종) 진단을 받은 게 그 무렵이었다. 2년여 간 투병하면서도 그는 뉴욕주의 일과 베일리하우스 CEO직을 놓지 않았다. 숨질 때까지 그에겐 “그 일이 여전히 중요”했을 것이다. GMHC의 에이즈 운동가 레리 크레이머는 “이 특별한 사람을 잃어 우리의 삶은 조금 더 가련해지게 됐다. 그는 우리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해 싸운, 가장 고결한 영웅이었다”고 기렸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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