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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보수ㆍ진보 가릴 것 없이 종교성에 취한 나라, 그게 미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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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보수ㆍ진보 가릴 것 없이 종교성에 취한 나라, 그게 미국이다

입력
2018.07.13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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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 중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통탄할 '트럼프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작가 커트 앤더슨은 좌우 가릴 것이 없이 널리 퍼져 있는, 미국 특유의 종교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로이터 연합뉴스
연설 중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통탄할 '트럼프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작가 커트 앤더슨은 좌우 가릴 것이 없이 널리 퍼져 있는, 미국 특유의 종교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로이터 연합뉴스

“좌우 어느 쪽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사실 진보 엘리트와 보수 포퓰리스트의 상당수는 서로 다른 유니폼을 걸친 같은 팀, 바로 판타지랜드 팀의 멤버들이었다.” 진한 블랙 유머 덕에 읽어가는 내내 큭큭 대다, 이 대목에선 마침내 허리를 꺾어 크게 웃었다.

‘트럼프 현상’에 대한 책은 많다. 단언컨대 이 책은 가장 압도적으로 재미있다. ‘트럼프 현상’을 다룬 책은 대개 백인 노동자의 분노에 초점을 맞춘다. 흑인 주제에 멋지게 연설하는 버락 오바마도 짜증나던 판에, 주류에 찌든 재수없는 페미니스트 힐러리 클린턴이라니. 천편일률적으로 민주당이 더 왼쪽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결론이다. 그런데 한탄은 허탈한 농담과 거친 자학을 섞어줘야 제 맛. ‘트럼프 현상’은 ‘미국의 일탈’이 아니라 ‘미국의 본질’이라 해보면 어떨까.

저자는 어느 모임에 갔다가 이런 질문을 받는다. 1960년대 우드스톡의 세례를 받은 우리들이 시민권, 여성과 게이의 인권, 환경 등 수많은 분야에서 성공을 이끌었는데,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느냐고.

그 질문을 곱씹다가 저자가 찾아낸 답은 이렇다.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미국은 종교성에 취한 ‘판타지랜드’여서다.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오래 전 “현대는 무신론의 시대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다신론의 시대”라 해둔 바 있다. 저명한 학자의 이 간명한 명제를, 이 책은 수다, 익살, 비유, 유머로 버무려 700여쪽으로 뻥튀기했다.

먼저 보수 포퓰리스트. 복음주의 기독교 얘기는 많다. 저자의 차별성은 그 기원을 마르틴 루터에까지 소급한다는 점이다. 루터의 ‘만인사제설’은 부패한 가톨릭을 분쇄한 개혁이자, ‘성경 따위 내 마음대로 해석하면 그 뿐’이라는 “독선적 종파 분리주의자들”을 양산해 낸 악의 축이다. 미국은 독선적 종파 분리주의의 최정점에 있던 청교도들이 ‘신정국가’를 세우겠다며 험난한 대서양을 건너가 세운 나라다. 그런 판타지를 “순순히 믿는 사람들로 일종의 자연선택이 이뤄져 형성”된 것이 미국인이며, 그래서 미국인에게는 “몽상가들과 호구들”의 DNA가 새겨져 있다.

'판타지랜드'를 쓴 작가 커트 앤더슨. 자기만족적인 환상적 사실에서 벗어날 것을, 그러니까 이제는 어른이 될 것을 미국에 주문한다. 세종서적 제공
'판타지랜드'를 쓴 작가 커트 앤더슨. 자기만족적인 환상적 사실에서 벗어날 것을, 그러니까 이제는 어른이 될 것을 미국에 주문한다. 세종서적 제공

한번 꼽아보라. 개신교의 온갖 종파를 구분하는 교리상의 심대한 차이가 무엇인지. 사실 별 차이는 없다. 있다면 진정성의 차이(라고 주장될) 뿐이다. 진정성 문제란 저자에게 맥주시장과 같다. 공장에서 찍어내긴 매한가진데, 이 맥주는 자본 논리에서 벗어난 진짜 맥주라고 주장하고, 시장은 속아준다. 미국엔 온갖 극단적 종파주의자들이 다 모였으니 종교전쟁이라도 벌어져야 할 텐데, 서로 잘 지내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극단주의 종파이긴 서로가 매한가지니까.

저자는 이런 관점에서 감리교, 몰몬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오순절교회 등 온갖 새로운 개신교 운동을 정리한다. 흔히 ‘대각성 운동’이라 불리는 이 흐름을 ‘대망상 운동’이라 비꼬면서 말이다. 한국 얘기가 빠질 리 없다. 그건 직접 읽어보길. 미국 역사를 정치경제사가 아니라 ‘신비주의와 마법의 역사’로 읽어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제 진보 엘리트 차례다. 방심 말라. 똑같은 냉소가 날아가니까.

제일 먼저 도마 위에 오른 건 헨리 데이비드 소로. 오, 반자본 반문명의 수호성인인 이 사람이 대체 왜.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간 그는 “800일을 (대자연에서) 보낸 뒤 도시로 돌아와 부친의 연필 공장 일을 도우며 남은 평생을 도심 한 가운데 있는 아버지 소유의 저택에서 살았다.”

포인트는 소로의 위선이 아니다. 피터 버거의 명제를 다시 음미해보자. 현대는 무신론이 아니라 다신론의 시대다. 진보는 무신론자가 아니라 다신론자다. 예수를 몰아낸 자리에 자연, 나, 뉴에이지, 사이언톨로지, 요가, 참선, 정신의학, LSD 같은 환각제나 마약, 상대주의적 진리관 같은 온갖 것들을 다 끌어들였다. 광활한 자연, 휴머니즘, 영성, 정체성, 유아론(唯我論)에 가까운 개인주의 앞에서 힙한 포즈를 취하는 게 진보 엘리트들이다.

판타지랜드

커트 앤더슨 지음ㆍ정혜윤 옮김

세종서적 발행ㆍ720쪽ㆍ2만5,000원

저자는 토머스 쿤의 과학철학이 파울 파이어아벤트 등에 의해 급진화되는 과정, 피터 버거의 사회구성주의에 대한 오해, 마이너리티에 대한 미셸 푸코의 연구가 미국에 토착화되는 과정, 미국 우파에게 “유용한 바보”로 활용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문제 등을 하나씩 짚어나간다. 이 과정에서 존 F. 케네디와 지미 카터 같은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물론,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등이 차례로 자근자근 밟힌다.

사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널리 쓰이게 된, 미국의 방귀 깨나 낀다는 지식인들을 충격과 경악으로 몰아 넣은,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 혹은 ‘합의된 현실(Consensus Reality)’ 같은 표현을 곱씹어보라. 진보 엘리트의 화법과 비슷해보이지 않던가.

남의 땅 얘기라고 신나게 웃고 나면, 시선은 우리 땅으로 넘어온다. 일베와 워마드 같은 곳에서 나도는 극단적 주장이 인터넷을 도배하고, 뉴스 채널은 변호사들의 만담장이 되고, ‘기레기’라는 조롱과 적폐청산 구호를 타고 음모론자들이 지상파방송에까지 진출하는 시대다. 판타지랜드는 우리의 일이기도 하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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