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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포커스] "소개팅도, 해외 활동도 하지마"... 걸그룹이 노예인가요

입력
2017.07.1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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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트와이스(사진 위)는 일본에서 활동을 많이 한다는 이유로 염산 테러 협박을 받았고, 에이핑크(아래)는 일반인과 소개팅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고 세 차례의 살해 및 폭탄 테러 위협을 받았다. JYP·플렌에이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룹 트와이스(사진 위)는 일본에서 활동을 많이 한다는 이유로 염산 테러 협박을 받았고, 에이핑크(아래)는 일반인과 소개팅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고 세 차례의 살해 및 폭탄 테러 위협을 받았다. JYP·플렌에이엔터테인먼트 제공

#1. 그룹 트와이스는 최근 염산 테러 협박을 받았다. 지난 2일 극우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에 한 네티즌이 ‘한국 두 번 다시 오지 마라’며 ‘공항에서 염산 10리터 대기 중일 테니’라는 위협적인 글을 올려서다. ‘우리나라를 버리고 일본에서 돈 엄청 번다’는 게 트와이스에 분노를 표한 이유였다. 트와이스 소속사인 JYP엔터테인먼트는 이 글을 올린 이를 상대로 6일 강남경찰서에 고소장을 접수했다.

#2. 그룹 에이핑크는 최근 한 달 새 세 차례에 걸쳐 살해 및 폭발물 테러 협박을 받고 충격에 빠졌다. 경찰은 112 등을 통해 녹음된 협박범의 전화 음성을 바탕으로 같은 용의자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 3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협박범은 에이핑크가 지난 4월 일반인과 함께 하는 인터넷 소개팅 프로그램에 출연한 점 등에 불만을 품고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여성 혐오의 다른 이름, 심해지는 성적 대상화

걸그룹들이 잇단 테러 협박에 몸살을 앓고 있다. 여성 아이돌에게 일터는 수난의 장이다. 여성 아이돌은 안경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뒤 팬 사인회에 참석하는 일부 남성 팬의 도를 넘은 관음증에 속앓이해야 하는 것을 넘어 음악 방송 녹화장에서 신체 위협까지 받으며 인권 사각지대에 몰렸다.

일부 남성 팬들의 걸그룹에 대한 위협은 사회 문제로 떠오른 여성 혐오와 닮아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여성 아이돌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고 말을 듣지 않으면 극단적인 폭력성을 드러내는 행위가 여성 혐오의 또 다른 동전의 양면”(이수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이라 문제가 심각하다는 지적이다. 일반인과 소개팅(에이핑크)을 하고,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더 많이 활동(트와이스)한다고 적대시하고 배척하는 건 여성 아이돌을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상품’으로 보는 멸시적 시선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여성 아이돌의 성적 대상화는 날로 심해지고 있다. 그룹 프리스틴의 소속사인 플레디스는 지난 3월 팬 사인회 공지에 ‘멤버들에게 볼을 꼬집는 접촉을 삼갈 것’이란 당부를 넣었다. 걸그룹이 볼 꼬집힘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볼을 꼬집는다는 건 상대를 존중할 땐 이뤄질 수 없는 행위다.

그룹 여자친구(사진 위)는 팬 사인회에서 몰래카메라 안경을 쓰고 온 남성 팬을 적발했고, 나인뮤지스는 무대 바로 앞에서 멤버들의 치마 속을 찍는 관객의 촬영을 제지했다. 팬사인회 영상 등 캡처
그룹 여자친구(사진 위)는 팬 사인회에서 몰래카메라 안경을 쓰고 온 남성 팬을 적발했고, 나인뮤지스는 무대 바로 앞에서 멤버들의 치마 속을 찍는 관객의 촬영을 제지했다. 팬사인회 영상 등 캡처

“돈 벌기 힘들지?” 상품 취급… 집단상담 받는 걸그룹

특히 신인이나 청순 콘셉트를 내세운 걸그룹의 피해가 심각하다. 올 상반기에 팬 사인회를 연 한 걸그룹 멤버는 어느 남성 팬으로부터 “돈 벌기 힘들지?”란 말을 들었고, 음성 파일이 온라인에 퍼지며 팬들 사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모욕적인 발언을 한 팬에게는 여성 아이돌이 앨범을 사준 팬들에 웃음을 팔며 그 값을 지급해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여성 아이돌은 ’어차피 보여주기 위해 데뷔한 것 아니냐’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시선의 폭력이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윤정주 여성연예인인권지원센터 소장은 “여성 연예인 인권 관련 일을 한다고 하면 ‘그들은 성공을 위해 술자리에 가는데 왜 이 사안을 우리가 같이 싸워 줘야 하느냐’ ‘돈을 많이 받으면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어이없는 인식을 지닌 분을 많이 만난다”고 말했다.

연예 산업의 구조적인 문제도 여성 아이돌 인권 향상의 걸림돌이다. 기획사는 돈을 쓰는 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불합리한 요구와 행위에 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이 환경 속에서 자란 여성 아이돌은 “감수해야 할 문제”라고 인권 문제에 눈을 감아 악순환은 반복된다. 여성연예인인권지원센터에 따르면 길거리 캐스팅된 19세 가수 지망생은 ‘많은 톱스타가 누드 촬영을 하고 시작했다. 누드 촬영을 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처음엔 강하게 거부하다 할 수 없이 촬영을 했다. 심리 상담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걸그룹 멤버 중 여성 아이돌을 바라보는 비하적인 시선과 강압적인 환경으로 활동에 염증을 느껴 일반인과 함께 집단 상담을 받는 이도 있다.

‘몰카범’ 직접 색출… “여성 아이돌도 노동자” 인식 전환 시급

인권 침해를 보호해줄 수 있는 기반이 취약하다 보니, 일부 여성 아이돌은 직접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 그룹 여자친구 멤버인 예린은 지난 3월 팬 사인회에서 앞에 앉은 남성이 안경에 몰래카메라 장치를 한 걸 확인한 뒤 매니저에게 알려 영상 삭제와 퇴장 조처를 취했다. 그룹 나인뮤지스의 전 멤버인 현아는 한 대학교 축제에서 노래 ‘티켓’을 부를 때, 무대 바로 앞에서 멤버들의 치마 속 등을 찍으려던 관객을 발견한 뒤 “아래에서 찍지 말아달라”고 촬영을 막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여성 아이돌의 몸부림만으론 달걀로 바위 깨기일 뿐이다. 주위의 인식 변화가 시급하다. 정슬아 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사무국장은 “여성이 걸그룹 멤버가 되고자 하는 것이 함부로 그의 몸에 침범할 권리를 허락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많은 사람이 모른 척 하는 게 아닌가를 다시 질문해야 할 때”라며 “여성 아이돌을 노동자로, 그들의 활동 무대를 노동 현장으로 바라봐야 문제의 해결이 시작될 것”이란 의견을 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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