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표향 기자

등록 : 2018.04.16 22:51
수정 : 2018.04.17 07:31

최은희, 영화 같은 삶 마치고 은막 너머로 떠나다

충무로 중흥기 이끈 세기의 배우, 92세로 별세

등록 : 2018.04.16 22:51
수정 : 2018.04.17 07:31

2011년 12월 21일 오후 강남구 역삼동 호텔에서 배우 최은희가 김정일 사망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고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우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54년 주한미군 위로를 위해 방한한 매릴린 먼로를 마중하는 최은희씨. 앳나인 필름

영화에 살고 사랑에 살았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이었다. 파란만장한 세월이 은막 너머로 흘러갔다.

1960년대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끈 원로배우 최은희씨가 16일 별세했다. 92세.

영화계에 따르면 최씨는 남편인 신상옥 감독이 2006년 타계한 뒤 건강이 악화돼 오랜 기간 투병 생활을 해왔다.

1926년 경기 광주에서 태어난 최씨는 1943년 극단 아랑에 입단하며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해방 이후 토월회와 극예술협회 등에서 무대 생활을 하다 1947년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서’로 영화에 데뷔했다. 이후 ‘밤의 태양’(1948), ‘마음의 고향’(1949) 등에 주연으로 발탁되며 급성장했다.

“영화에 미친 야생마” 신 감독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신 감독은 최씨의 영화 인생에 이정표 같은 존재였다. 한국전쟁으로 피난 간 부산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영화 ‘코리아’(1954)를 촬영하며 사랑에 빠져 1954년 결혼했다. 당시 첫 남편과의 갈등으로 심적 고통을 겪었던 최씨와 충무로 기대주 신 감독의 만남 자체는 장안의 화제였다. 두 사람은 이후 평생의 반려자이자 영화 동반자로서 신필름을 함께 이끌며 감독과 배우로 수많은 작품을 합작했다.

‘꿈’ ‘젊은 그들’(1955) ‘무영탑(1957)을 거쳐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으로 흥행 주가를 올렸고, ‘지옥화’(1958),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자매의 화원’ ‘춘희’(1959), ‘로맨스빠빠’ ‘백사부인’ ‘돌아온 사나이’(1960) 등을 잇달아 성공시켰다. ‘성춘향’(1961)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최씨는 배우로서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

최은희, 신상옥 부부의 다정하던 한 때.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 포스터(1961). 김진규, 최은희 주연.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성춘향’은 같은 소재의 ‘춘향전’과 세기의 대결로 영화팬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두 작품은 서로 충무로 최초의 컬러 시네마코프(가로의 비율이 큰 영화 상영 방식)를 자부했고 신 감독-최은희 커플과 홍성기 감독-김지미 부부의 맞대결로도 호사가들의 눈길을 끌었다. ‘성춘향’이 압도적인 흥행세를 보이며 신 감독과 최씨는 신필름 영화제국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1961), ‘열녀문’(1962), ‘쌀’ ‘로맨스 그레이’ ‘강화도령’(1963), ‘벙어리 삼룡’ ‘빨간 마후라’(1964) 등 한국영화사에 기록된 명작들이 신필름 이름 아래 두 사람의 손에서 탄생했다. 한국영화 전성기였던 1960년대는 신필름의 시대였고, 신 감독과 최씨의 시대이기도 했다. 신필름은 신영균 허장강 이예춘 남궁원 등을 전속배우로 둘 정도로 충무로에 제국을 일궜지만 최씨의 삶은 안락하지 않았다. 날로 커가는 회사 규모를 지탱하고 신 감독의 영화적 야망을 지원하기 위해 집을 파는 등 재정적 고통을 수 차례 겪었다. 사극영화를 만들 당시에는 최씨가 한복 바느질을 하기도 했다.

최씨는 전통적 여성상과 근대적 여성상을 동시에 그려내며 배우로서 독보적인 이력을 쌓았다. ‘열녀문’ ‘성춘향’ 같은 사극영화에서는 순종적인 여성을 연기하며 고전적 가치를 대변했지만, 양공주로 분한 ‘지옥화’와 유부남 애인을 가진 바걸로 등장한 ‘로맨스 그레이’에선 도발적인 연기로 자신의 이미지를 과감히 깨뜨렸다. 어떤 색으로도 변신이 가능한 만능 배우였다.

최씨는 은막의 스타에만 머물지 않았다. 직접 메가폰을 잡고 영화 연출에도 도전해 1965년 감독 데뷔작 ‘민며느리’를 세상에 선보였다. 한국영화 역사에서 세 번째 여성감독이다. 이후 ‘공주님의 짝사랑’(1967)과 ‘총각선생’(1972) 등 두 편의 연출작을 더 내놓았다.

후학 양성에도 관심이 많았던 최씨는 신 감독과 함께 1966년 안양영화예술학교(현 안양예고)를 설립하고 1969년 교장으로 취임했다. 배우 본업에도 열중해 1976년까지 영화 130여편에 출연했다. 최씨의 영화 인생과 1960~70년대 한국영화 역사는 서로 마주보며 같은 길을 걸었다.

북한에서의 최은희(오른쪽부터)씨와 김정일, 신상옥 감독. 앳나인필름 제공

북한에서의 최은희씨. 앳나인필름 제공

배우 오수미와 외도를 저지른 신 감독과 결별한 최씨는 1978년 1월 안양영화예술학교 교류사업차 홍콩을 방문했다가 북한으로 납치된다. 신 감독도 그 해 7월 납북돼 두 사람은 1983년 북한에서 재회한다. 북한 신필름영화촬영소 총장을 맡아 다시 영화 작업을 시작한 두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1984) ‘소금’ ‘심청전’(1985) 등 북한에서 영화 17편을 제작했다.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에 미국 대사관에 진입해 망명한 두 사람은 10년 넘는 미국 생활 끝에 1999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이후 최씨는 2001년 극단 신협의 대표로 취임했고 이듬해에는 안양에 신필름영화예술센터 건립을 주도했다. 2007년 자신의 영화 인생을 회고하는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펴내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신정균(영화감독)ㆍ상균(미국거주)ㆍ명희ㆍ승리씨 등 2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12호실 이전 예정), 발인은 19일 오전, 장지는 안성천주교공원묘지다. (02-2258-5940)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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