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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인쇄로 손과 몸의 감각을 깨우다

입력
2017.04.1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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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리(Factory) 그러니까 공장은 공장인데 F가 아니라 P로 시작한다. 종이(Paper)와 인쇄(Press)의 첫 글자 P를 써서 ‘팩토리ㆍPactory’다. 지난해 8월 서울 상수동에 문을 연 이 곳은 ‘종이와 인쇄의 실험 공장’을 표방한다. 1,000여 종의 종이와 디지털 이전의 인쇄기, 제본기를 갖춘 이 작은 공방은 종이와 아날로그 인쇄의 만남을 통해 손과 몸의 감각을 깨우는 곳이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한 시대, 컴퓨터 모니터에 갇힌 추상적이고 납작한 세계 대신 손으로 만지고 느끼며 생생하고 입체적인 감각을 되찾고자 한다. 한 장 한 장 손으로 찍어내는 느리고 불편한 방식에서 우리는 오래된 미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명함이나 엽서용 활판 인쇄기 아다나. 손으로 레버를 움직여 한 장 한 장 눌러 찍는다. 팩토리 제공
명함이나 엽서용 활판 인쇄기 아다나. 손으로 레버를 움직여 한 장 한 장 눌러 찍는다. 팩토리 제공

팩토리는 상수동의 명소인 이리카페 지하에 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아래 정면에 묵직한 갈고리가 달린 쇠줄이 늘어져 있다. 예전 이 자리에 있던 플라스틱 공장에서 쓰던 화물 운반용 도르래다. 안으로 들어가면 벽 하나를 서랍장이 차지하고 있다. 1,000여 종의 종이를 색깔과 무게에 따라 분류한 1,365 칸의 서랍이 가지런하다. 인쇄와 제본 기기로는 아날로그 방식인 레터프레스(활판인쇄)와 실크스크린 장비, 디지털 인쇄기지만 수작업적 요소가 강한 리소그래프(Risograph) 기계, 미니 옵셋인쇄기, 사철제본기와 미싱제본기 등을 갖췄다. 이처럼 종이부터 인쇄와 제본, 재단까지 한자리에서 할 수 있는 곳은 국내에서 여기가 거의 유일하다. 규격화한 대량생산으로는 불가능한 다양하고 실험적인 작업을 할 수 있어 디자이너나 출판인에게는 매우 요긴한 곳이다. 나만의 책이나 카드, 명함 같은 것을 만들고 싶은 사람에게도 열려 있다. 종이 판매, 인쇄와 제작 외에 교육 워크숍도 한다.

종이 전문가인 최병호 전 두성종이 이사와 그래픽 디자이너 장성환씨가 함께 차려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203 디자인스튜디오 대표이자 홍대앞 동네잡지 ‘스트리트 H’ 발행인이기도 한 장씨는 컴퓨터 모니터와 마우스로만 하는 그래픽 디자인에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장성환 팩토리 공동대표의 리소그래프 워크숍. 리소 인쇄물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장성환 팩토리 공동대표의 리소그래프 워크숍. 리소 인쇄물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도구가 생각을 만듭니다. 디지털 이전에도 디자인은 있었고, 훨씬 더 다양한 인쇄 방식이 있었는데, 요즘 학생들은 어도비 프로그램이 없으면 디자인을 못해요. 디지털을 벗어나보자 생각했죠.책은 입체인데, 슈퍼평면(모니터)으로만 하는 디자인 작업은 한계가 있어요. 디지털을 거부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디지털 이전의 원형을 모르면 미래가 없어요. 그걸 알아야 다른 선택이 가능해요. 책만 해도 제본은 중세 이후 등장했고 그 전에는 두루마리나 죽간책 같은 게 있었죠. 그런데 요즘은 책 만든다고 하면 주로 판형과 종이만 생각하잖아요.”

아무리 디지털이 대세라지만 디지털이 대체할 수 없는 몸의 감각을 강조하는 것은 최씨도 마찬가지다. 같은 디자인, 같은 책을 인쇄해도 어떤 종이를 쓰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는 데서 알 수 있듯 종이의 물성은 그 자체로 강렬한 힘을 갖고 있다. ‘종이 박사’ ‘종이 소믈리에’로 불리는 그는 “정보를 파일로 저장하는 시대라 공부하고 기록하기 위한 종이 인쇄물은 줄어들고 있지만, 만지거나 갖고 놀면서 즐기는 놀이 도구로서의 종이, 소장 가치가 있는 종이책을 찾는 수요는 계속 커질 것”이라고 설명한다. 종이 고유의 물성에 반응하는 감각은 저마다 달라 고유한 경험과 기억으로 남는다. “디자이너 가운데 종이 이름을 대면서 찾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어떤 종이를 원하느냐고 물으면 매끌매끌한 종이, 아기 살결같은 종이, 조금 거친 종이 식으로 말하죠. 몸이, 감각이 먼저이고 감각은 표준화될 수 없어요. 극히 주관적이서 직접 느껴보는 수밖에 없죠.”

일반 인쇄소는 대량 생산을 주로 하기 때문에 특수종이 인쇄나 소량 인쇄를 잘 해주지 않는다. 킨코스 같은 출력소가 있지만, 종이의 특성을 잘 모른다. 딱 맞는 종이를 골라서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인쇄할 곳을 찾던 사람들에게 팩토리는 반가운 공간이다.

활판인쇄기 밴더쿡(아래)과 아다나(뒤쪽). 전력을 쓰지 않는 수동식 기계다.
활판인쇄기 밴더쿡(아래)과 아다나(뒤쪽). 전력을 쓰지 않는 수동식 기계다.
사철제본기. 오래 전 생산이 중단된 것을 어렵게 구해다 놨다.
사철제본기. 오래 전 생산이 중단된 것을 어렵게 구해다 놨다.

장 대표는 “손으로 하는 일의 특별함이 종이와 책을 특별하게 만든다”며 “평면 모니터와 마우스를 벗어나 기계와 종이와 손으로 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페이스북은 사내에 ‘아날로그 리서치 랩’을 운영하고 있어요. 직원들을 위한 수작업 인쇄공방이죠. 전형적인 IT기업인 페이스북이 왜 이걸 만들었을까요. 디지털 이전의 직접적인 경험을 제공하려는 게 아닐까요?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머리만으로 되는 게 아니고 손을 쓰는 데서 나오니까요. 모든 디지털은 아날로그를 표방하게 돼 있습니다. 인스타그램도 폴라로이드 카메라에서 영감을 얻은 거고요. 하지만 요즘 젊은 교수들은 수작업으로 책을 만들어본 경험이 없어요. ”

페이스북의 아날로그 리서치 랩에서 만드는 포스터는 판매하지 않는 사내 게시용이지만 멋진 디자인과 대담한 메시지로 유명하다. 수집가들이 눈독을 들이는 작품이라 지난해 11월 모처럼 경매에 나왔을 때 호응이 뜨거웠다. 페이스북은 사내 목공방도 운영하고 있다. 이 또한 손의 감각을 깨워 머리보다 몸 전체로 창조적인 감각을 익히는 공간이다.

“손을 사용하는 게 중요하다. 그것이 당신이 소나 컴퓨터 오퍼레이터와 다른 점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가장 위대한 그래픽 디자이너’로 존경했던 폴 랜드가 한 말이다. 현존 최고의 사진작가 중 한 명인 로버트 폴리도리는 이렇게 말했다. “디지털은 잊기 위함이고 아날로그는 간직하기 위함이다.” 손으로 만든 것은 몸이 기억한다.

팩토리의 활판인쇄 장비는 명함 인쇄용 ‘아다나’와 좀 더 큰 것을 인쇄할 수 있는 ‘벤더쿡’이 있다. 아다나는 오래 전 단종된 영국 기계다. 둥근 금속판에 잉크를 바르고 그 아래 인쇄판을 놓은 다음 레버를 들어올려 꾹 눌러서 한 장 한 장 찍어낸다. 손으로 핸들을 돌려 인쇄하는 벤더쿡 역시 생산 중단된 것을 뉴욕에서 어렵게 구해 왔다. 손으로 밀어 넣어서 묶는 사철제본기도 30여 년 전 단종돼 고철로 버려질 뻔 했던 것이다. 요즘은 보기 힘든 이 장비들은 디지털 자동화 장비에 비해 사용이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규격화ㆍ표준화한 생산 방식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독특한 감각의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팩토리는 1,000여 종의 종이를 갖추고 있다. 종이 전문가인 최병호 팩토리 공동대표가 종이 서랍장 앞에서 설명하고 있다.
팩토리는 1,000여 종의 종이를 갖추고 있다. 종이 전문가인 최병호 팩토리 공동대표가 종이 서랍장 앞에서 설명하고 있다.

종이박사 최병호 대표가 내민 명함부터 그랬다. 아래쪽 작은 글자는 일반 디지털 인쇄인데 위쪽 큰 글자는 레터프레스로 찍었다. 딱딱한 종이에 꾹 눌러서 찍은 글자의 요철이 손끝에 느껴져 자꾸 만져보게 된다. 그렇게 기억을 각인시키는 명함, 오래 간직하고 싶은 명함이다.

장성환 대표는 “외국에서는 다양한 수작업 방식의 소량 인쇄가 10여 년 전부터 화제”라고 전하면서 “이제는 하이테크가 아니라 하이터치의 시대”라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각을 찾는 건 단순한 복고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디지털 방식에 따른 표준화, 규격화로 잃어버린 다양한 감각을 회복해 삶을 온전하게 파악하려는 일일 것이다.

글ㆍ사진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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