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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하고 다정한 시, 패션이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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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하고 다정한 시, 패션이 됐네

입력
2017.07.2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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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심보선의 본업은 대학의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다. 안식년을 맞아 하반기 미국으로 떠나는 그는 “전공인 사회학은 시를 쓸 때 남다른 상상력을 주는 재료가 된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시인’ 심보선의 본업은 대학의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다. 안식년을 맞아 하반기 미국으로 떠나는 그는 “전공인 사회학은 시를 쓸 때 남다른 상상력을 주는 재료가 된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백석·기형도, 혹은 파스칼 키냐르, 그도 아니라면 신용목·황인찬. 이들의 시 구절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 올리는 ‘문장 공유’가 유행이다. 이 유행 가운데 ‘가장 핫한 패션’을 꼽으라면 심보선의 시가 빠질 수 없다. SNS상의 인기 이전부터 매년 7,000~8,000부가 팔리는 그의 시집은 시 좀 읽는다는 독자들마다 이미 한 권쯤 구비하고 있는 필수 아이템으로 꼽힌다.

이제 인용할 꺼리가 한층 더 풍성해질 것 같다. 심보선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문학과지성사)를 냈다. 두 번째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 이후 6년 만에 내놓는 신간이다. 시집으로는 이례적으로 초판 5,000부를 찍었다.

18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시인은 소셜미디어 유행에 대해 “주목해 볼 만한 현상 같다”면서도 “SNS에서 작품이 부각되는 것과 시집이 팔리는 건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자신의 시가 온라인에서 재인용되면서 부분만 읽히거나 연, 행 구분 없이 잠언처럼 읽히는 현상에 대해서는 “시를 읽는 방식은 전적으로 독자한테 달린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화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연구하는 사회학자이자 여러 사회운동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온 활동가의 성정이 답변마다 묻어 나왔다.

“들어라/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랑한 것을 모두 증오했기에/ 자신까지 혐오하게 된 장자여// 들어라/ 실패한 자여/ 떠돌 만한 광야가 없어 제자리에서 맴도는 개 같은 인생이여// ($)// 들어라/ 인적이 드문 밤거리여/ 쨍그랑 병 하나가 깨지면 순식간에/ 모든 집의 불빛이 꺼지는 첨단의 도시여” (‘소리’ 부분)

고통받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말을 거는 시 ‘소리’로 문을 여는 이번 시집은 시인 특유의 ‘다정(多情)체’로 무장한 흡입력 강한 시 52편을 쏟아낸다. 아버지와 가족의 일화(‘다시 아버지를 생각하며’, ‘강아지 이름 짓는 날’), 이혼(‘말년의 양식’), 현재의 애인(‘카르마’)까지 자기고백을 밑천으로 한 시, 쌍용차 해고노동자 죽음과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 사고 등 사회적 비극을 드러낸 시(‘스물세 번째 인간’, ‘갈색 가방이 있던 역’), 시에 대한 고민(‘나는 시인이랍니다’, ‘나는 이제 시인이 아니랍니다’, ‘마치 혀가 없는 것처럼’) 등 다양한 방향의 단상들이 연쇄반응처럼 이어진다. “두 번째 시집을 낸 후 시집을 못 낼 줄 알았다”는 시인은 전작에서 보인 “성자는 못 되겠지만 죽어도 ‘꼰대’는 아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쓰는 실존적 ‘깽판’으로서의 시”(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면면을 그대로 이어간다.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 낸 사회학자 겸 시인 심보선. 홍인기 기자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 낸 사회학자 겸 시인 심보선. 홍인기 기자

특유의 多情체로 무장한

흡입력 강한 시 52편 실려

쌍용차 해고 노동자 이야기 등

사회적 문제 담은 작품도

-시집 낸 소감은?

“사회학 이론서를 낼 때와는 달리 내가 교정지를 보면서 흥분하더라(웃음). 두 번째 시집 내고 한동안 시를 못 쓰다가 재작년, 작년에 많이 쓰게 됐다. 항상 시집을 낼 때마다 ‘다음 시집을 낼 수 있을까?’ 생각한다. 이번 시집도 마찬가지다. 스스로에게 ‘애썼다’는 기분이 든다.”

-오랫동안 시를 못 쓴 이유는?

“2015~16년이 안 좋은 상태였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농반진반으로 ‘회복기에 시를 많이 쓴다’고 하는데, 시가 이런 회복 과정, 혹은 회복 의지의 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

-표제작을 정한 기준은?

“평소에 ‘잘 모르겠다’는 말을 좋아한다. 오늘은 과거 미래가 아니고 딱 지금 이순간을 말하는 것 아닌가. 현재에 담긴 불확정성이나 가능성이 내 시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국가론’ ‘사진들’ 등은 상황극처럼 읽힌다. 연, 행 구분이 없어서 시집이 아니라면 콩트라고 생각했을 거다.

“시 같지 않은 시들이다. (이런 시가 있어) 이번 시집은 한 편 한 편의 시를 모은다기보다 한 권의 책을 묶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 고백적인 시편이 많다

“첫 시집에 비하면 훨씬 덜 한 편인데, 사실도 있지만 사실 아닌 것도 많다. 상황을 가져다 픽션을 만드니까. 나를 고백한다기 보다는 내 경험이 시의 재료가 되는 건데, 굳이 이런 재료를 쓰는 이유는 내 경험이기 때문에 그 에너지를 좇아서 (이미지가) 확장될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사회적 문제를 담은 시편도 여럿이다. 사회 현장에서 읽혀지는 시는 다른 시 쓰기와 다른가.

“읽는 독자가 다르다. 책 읽는 사람이 아닌 현장의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고 생각하려 했다. 쌍용차 사태를 다룬 ‘스물세 번째 인간’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사망 원인을 시에 썼는데 노조원들은 잘 이해할 수 있지만 일반 독자들은 낯선 용어의 나열로 볼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 단 한 작품만 꼽자면?

-“시 ‘당나귀’다. 자율성과 타율성, 노동자면서 춤추는 존재가 나에게 당나귀, 예술이다.”

이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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