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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 마지막 날

입력
2016.05.2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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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9일 광주 망월동. 희생자 129명의 장례식이 열렸다.
1980년 5월 29일 광주 망월동. 희생자 129명의 장례식이 열렸다.

1980년 5월 27일 자정, 시내전화가 두절되었다. 전남도청의 학생시민투쟁위원회도 계엄군 재진압 공격이 임박했음을 직감했다. 앞서 26일 밤 9시, 협상을 위해 계엄분소를 방문한 수습위원들은 무장해제ㆍ무기반납 등 3개항과 함께 밤 12시가 시한이라는 계엄군의 일방 통보만 받고 온 터였다. 상황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했다. 새벽 2시 20분, 홍보부는 광주 시내를 돌며 거리방송을 시작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송원전문대생 박영순과 목포전문대생 이경희였다.

새벽 3시, 계엄군은 이미 시내에 진입해 있었다. “신군부의 내란목적 살인”인 ‘화려한 휴가’마지막 ‘상무충정작전’이 공식 시작된 것은 앞선 자정이었다. 공수부대 제3,7,11여단과 보병 제 20사단, 제 31향토사단 등 47개 대대 2만317명(장교 4,727명). 그 중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장교 276명 등 6,168명. 도청과 시민군 본부였던 광주공원 시민회관, YWCA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은 장교 36명 등 317명이었다. 당시 도청에는 그들이 폭도라 부르던 시민군 157명(중학생 3명, 고교생 26명 포함)이 남아 있었다. 새벽 4시 도청 전원이 차단됐다.

공수단 전투복을 벗고 20사단 보병 복장으로 위장한 3여단 11대대가 전남도청에 진입한 것은 새벽 4시 10분. 그들은 ‘폭도’15명을 사살하고 5시 21분 도청을 장악했다. 7여단 33대대가 진입한 시민회관은 전원이 도청 항쟁본부로 옮겨간 탓에 사실상 비어 있었다. 사무실을 지키던 조일기(당시 36)는 다음날 아침 총상이 아닌 구타로 숨진 채 발견됐다. 11여단은 전일빌딩 YWCA에서 30여 명의 청년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산발적 저항까지 모두 끝이 난 건 새벽 6시 20분이었다. 7시 30분, 공수단은 도청과 YWCA의 시신 등 모든 ‘상황’을 20사단에 인계하고 철수했다. 이어진 가택 수색과 연행. 열흘 간의 광주 항쟁이 그렇게 끝이 났고, 5월 27일 아침이 시작됐다.

그날 밤 10시 50분, 목포 시민 3,500여 명의 분노와 추모의 첫 횃불시위가 시작됐다.

*<5월 18일, 광주>( 김영택, 역사공간), <조갑제의 광주사태>(조갑제닷컴), <5.18민중항쟁사>(518사료편찬위원회) 참조,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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