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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 옆 동화같은 길...프랑스식 올레 '생뜨마히'

입력
2017.06.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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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를 걸은 탓일까, 기시감이 몰려왔다. 파도에 넋을 놓기도, 콧등에 성근 땀을 바람에 식히기도, 사람 사는 시큼한 풍경을 마주하기도 하는 길. 바람에 머리칼이 가늘게 흩날렸다. 파리에서 약 435km, 대서양을 접한 뽀흐닉(Pornic)의 생뜨마히 둘레길(le circuit de Sainte-Marie)은 걷기의 정당성과 행복감을 동시에 안겨주는 길이다.

생뜨마히 둘레길은 뒤돌아보는 습관이 생긴다. 나의 과거를 돌이켜볼 수 있다면 교만할 리 없을 텐데.
생뜨마히 둘레길은 뒤돌아보는 습관이 생긴다. 나의 과거를 돌이켜볼 수 있다면 교만할 리 없을 텐데.

“프랑스 어디? 뽀흐닉이라고?”

“응. 프랑스 서쪽 대서양에 접한 아주 작은 도시야.”

탕탕의 대답에는 유럽 소도시에 응당 따라오는 환상이 배어 있었다. 골목길의 수런거림, 빵 굽는 냄새, 창문 앞에 만개한 생화 등은 우리네 사는 일상 풍경인데도 왜 그리 소스라치게 기쁜지. 행복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다고나 할까. 뽀흐닉도 그랬다. 브르타뉴(Bretagne)의 남동쪽, 넓은 프랑스에서 땅에서 점 하나에 불과한 소도시의 매력에 빠졌다.

쁘헤팔리예(Préfailles), 생미셸셰프셰프(Saint Michel Chef Chef), 라쁠란느수흐메흐(La Plaine sur Mer), 쇼베(Chauve) 등 인근 마을도 동화책의 한 페이지처럼 예쁘다. 연중 유순한 지중해성 기후는 계절을 잊게 한다. 뽀흐닉 어디에서든 바닷바람의 간지럼이 옆구리를 파고든다. 사계절을 담은 길을 걷다 보면 주인 없는 들판인가 싶었을 때 제법 큰 마을을 만나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자연 속으로 서둘러 사라진다. 그 배후엔 대서양이 크게 가슴을 열고 있다.

뷰포트(Vieux Port) 앞 샤또드뽀흐닉(Château de Pornic). 생뜨마히 둘레길의 시작이자 끝이다.
뷰포트(Vieux Port) 앞 샤또드뽀흐닉(Château de Pornic). 생뜨마히 둘레길의 시작이자 끝이다.
샤또드뽀흐닉은 그나마 인구밀도가 높은 번화가가 코앞이다. 아기자기하다기보다 고상한 풍경.
샤또드뽀흐닉은 그나마 인구밀도가 높은 번화가가 코앞이다. 아기자기하다기보다 고상한 풍경.

뽀흐닉의 생뜨마히 둘레길은 총 8.5km, 대부분 평지다. 오르락내리락 승부욕에 불타는 올레꾼이라면 싱거울까. 대신 시작이 곧 끝이 되는 낭만적인 순환로다. 아스팔트와 풀숲, 모랫길, 돌길 등을 관통하며 발은 호강한다.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마찰력이 그 길에 있다..

출발점은 샤또드뽀흐닉의 주차장, 고개를 꼿꼿이 들면 ‘푸른 수염의 성’이란 이름의 세모꼴 지붕이 눈에 걸린다. 여러 주인의 손을 탔지만 유명세는 15세기에 멈춰 있다. 잔혹동화 ‘푸른 수염’의 모티브가 된 질드레(Gilles de Rais) 남작이 호의호식하던 때다. 세계 최초의 아동 연쇄 살인마란 악명의 주인공이 살던 곳이라니, 달아나듯 걸음을 뗐다.

내리막길로 시작하니 으슬으슬한 기운은 금세 가셨다. 뽀흐닉이 볼거리로 강조하는 프랑스식 고인돌도, 생뜨마히 교회도 별다른 감흥 없이 지나쳤음에도 두 다리는 신이 난다. 고층 빌딩에서 완벽히 해방된 소도시가 주는 심리적 위안이었다.

뽀흐닉의 명물 강태공의 베이스캠프. 구릉의 변주가 바다를 더욱 리드미컬하게 한다.
뽀흐닉의 명물 강태공의 베이스캠프. 구릉의 변주가 바다를 더욱 리드미컬하게 한다.
해안과 집이 마주한 길은 스스로 정원이 된다.
해안과 집이 마주한 길은 스스로 정원이 된다.
이름 없는 해안 구릉 사이의 숨은 해변. 세상의 주인공은 나다.
이름 없는 해안 구릉 사이의 숨은 해변. 세상의 주인공은 나다.
바람 따라 겸손하게 인사하는 둘레길의 고목.
바람 따라 겸손하게 인사하는 둘레길의 고목.

이 길의 절정은 약 4km에 걸친 셍뜨마히 해안이다. 걷기에도 음계가 있다면 도에서 시로 짜릿하게 감성을 찌른다. 바닷바람이 온몸을 회오리쳤다. 바다는 육지로 가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기어이 육지를 파고들어 만(灣)을 이뤘다. 길은 가히 걷기를 위해 만들어졌다. 보도가 간헐적으로 차도와 가까워질 때도 자동차는 언제나 걷는 사람에게 풍경을 허용했다.

잠시 걷기의 외도도 즐겼다. 혀를 길게 뺀 구릉과 절벽 사이 오렌지 빛 모래 위에 몸을 뉘었다. ‘프라이빗 섬’을 독차지한 느낌은 착각인가 현실인가. 바다를 바라보는 길가의 별장은 매일 이런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자연에 홀로 초대받았어’라면서. 하늘 지붕은 유난히 낮고 따사로웠다. 느릿느릿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계바늘이 흐르고 있었다.

항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생뜨마히 둘레길에서 그 끝은 다시 번화가(?)다.
항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생뜨마히 둘레길에서 그 끝은 다시 번화가(?)다.
뽀흐닉의 명물인 라프레지에(La Fraiseraie)의 콘 아이스크림.
뽀흐닉의 명물인 라프레지에(La Fraiseraie)의 콘 아이스크림.
걷기의 끝자락에 만난 거짓말 같은 깃털 구름. 가슴 터지는 환희가 왔다.
걷기의 끝자락에 만난 거짓말 같은 깃털 구름. 가슴 터지는 환희가 왔다.

쭉쭉 하늘에 선을 긋는 보트의 끄트머리가 보일 때쯤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걸 느꼈다. 출발한 뒤 놀멍쉬멍, 4시간여가 지난 후였다. 뽀흐닉의 명물 아이스크림을 날름거리며 생각했다. 걷는 이의 사유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건강상의 이유로, 헤어졌기 때문에, 다짐하고 싶어서…. 각자의 사연으로 길을 밀고 간다. 길은 답할 것이다. 도사처럼 척, 해답을 던지진 않는다. 걷기는 그 해답이 나에게 있음을 마디마디 새겨 넣는 일이므로.

생뜨마히 둘레길 추가 정보

생뜨마히 둘레길은 제주올레 6코스를 제법 닮았다. 쇠소깍과 숲길, 이중섭 거리 등 해안과 도심이 적절히 안배돼 지루할 틈이 없다. 집중한다면 약 2시간여 걸리지만, 걷기 나름이다. 미리 점심을 준비해 해안가에서 피크닉 기분을 내거나, 맘 내키면 바닷물에 풍덩 뛰어들 시간도 고려할 것. 뷰포트 앞 관광안내소에서 지도를 구할 수 있다. en.ot-pornic.fr /@DestinationPornic

강미승 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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