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은 숨쉴 때 빼곤 다 거짓말한다”라는 오래된 농담을 떠올려보면 450여쪽에 이르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자서전 : 문명국가로의 귀환’(메디치 발행) 가운데 가장 믿을 만한 구절은 딱 하나일 것이다. “나는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권력을 의식하는 사람으로 간주되었으며, 사민당의 마음을 진정으로 따뜻하게 녹이지는 못한다고 여겨졌다.”
슈뢰더 본인도 딱히 부인하진 않는다. 가령, 오스카 라퐁텐처럼 동시대 사민당 내에서 가장 유력했 좌파 정치인과의 콤비 플레이를 두고 “가슴은 라퐁텐, 머리는 슈뢰더”라는 묘한(?) 표현을 쓰더니, 나중에는 라퐁텐을 ‘야당 체질’이라고 슬쩍 깎아 내린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한 노동자로 자랐고 그 때문에 사민당에 열광했지만, 슈뢰더 그 자신은 사민당의 기존 지지층만 만족시키는 뻔한 논리들에 별 관심이 없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슈뢰더 자서전은 독일 정치인의 책이라곤 하지만, 요아힘 가우크의 ‘자유; 독일 대통령은 왜 지금 자유를 말하는가’(부엔리브로 발행), 리하르트 폰 바이츠체커의 ‘우리는 이렇게 통일했다’(창비 발행)를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내보이는 짙은 정치적 성찰’의 냄새가 없다. 그 역할은 간간히 등장하는 사민당의 원로 에르하르트 에플러가 해준다.
대신 슈뢰더의 페이지를 채운 것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얘기다. 그래서 이 책은, 읽는 이의 성향에 따라 자기 변명으로 가득 찬 거짓 모래성으로 비춰질 수도 있고, 반대로 현실정치에서 진보의 성취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심으로도 읽힐 수 있다.
슈뢰더 집권기(1998년~2005년)에서 우리에게 가장 인기있는 아이템은 ‘하르츠 개혁’이다. 실업급여와 연금제 개혁을 골자로 한 이 조치는 노조와 복지를 비판하고 싶은 이들의 단골 메뉴다. 하르츠 개혁에 대해 얘기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빼먹는 얘기도 있다. 슈뢰더는 2000년에 원자력발전소 합의를 이끌어냈다. 원전 가동을 현 수준에서만 유지하고, 가동연한이 다 차면 자동적으로 없애자는 방향의 합의다.
또 다른 얘기도 있다. 슈뢰더는 이라크전 개전을 반대한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말아먹는다는 온갖 비난이 쏟아지지만, 슈뢰더는 굴하지 않을 뿐더러 한걸음 더 나아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과도 손을 잡는다. 무슨 비판이 나왔을 지는 안 봐도 훤하다.
요즘 슈뢰더는 러시아 국영석유회사와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국제뉴스에 오르내린다. 자서전 내용으로 봤을 때, 슈뢰더는 독일어가 유창한 푸틴과의 대화를 즐길 뿐 아니라 유럽과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로 엮이는 것이 유럽의 긴장완화와 평화에 기여한다고 확신하는 것 같다. 미국ㆍ영국 같은 대서양 국가들이 가장 질색하는, 중부유럽이 저 어두컴컴한 유라시아 대륙의 러시아에게 빨려 들어가는 모양새다. 슈뢰더의 개혁이라면 하르츠 말고도 얘기할 게 많다.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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