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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오메 단풍 들것네”

입력
2017.11.02 12:57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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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스치는 삽상한 기운이 가을이다. 한 번은 고개를 들어 공활한 하늘에 잠긴 산이라도 둘러 볼 일이다. 계절의 감각을 찾아 욕망의 다람쥐 쳇바퀴를 벗어나는 작은 반란이라도 조심스럽게 감행할 일이다. 계절이 다른 색깔로 색칠한 익숙한 것들의 새삼스런 변화에 눈이 부시다. 위대한 여름의 천둥 몇 개씩이나 품었던 열매를 맺고는 내년 봄의 나무건강을 위해서 잎을 떨굴 준비를 하는 빛과 색의 향연이 절정이다. 계곡의 물소리도 한층 맑고 청아하다.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다짐 속에 또 한 해가 지나는 쓸쓸함도 언뜻 스친다. 잎을 떨군 정직한 나목(裸木)의 모습대로 한겨울을 견뎌내야 하는 나무들의 결연함도 예비되어 있다. ‘낙엽 밟는 소리가 좋으냐?’는 낭만은 나무들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메아리일 수 있다. 버리지 못하면 새로 얻지 못한다. 낡은 인연을 움켜쥔 채 헤어나지 못하고 일상에 가까스로 안심하는 우리들에게 해마다 내리치는 나무들의 죽비소리인지도 모른다. 항상 푸르다는 소나무도 솔잎 몇몇은 노란 낙엽인 갈비를 바람에 흩날린다.

누이가 서성거리는 뒤뜰 장독대에 날아든 붉은 감잎 한 장에 가을이 무르익는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겠다는 김영랑 시인이 가을을 맞는다.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에 가득 찬 가을 풍경은 “오메 단풍 들겠네!”라는 탄성이다. 누이와 시인의 합창인지도 모른다. 감나무는 고향이다. 오늘따라 아버지가 장대 끝이 미치지 못해 까치밥으로 남긴 빨간 감 하나가 그립다. 산 너머 신기루를 좇아 무엇을 이루는 동안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소년은 성장했다. 가을은 불면의 밤이기도 하다. 서정주 시인이 1947년에 발표한 ‘국화 옆에서’의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로 위안을 삼았다. 들국화라고 불리는 구절초, 쑥부쟁이, 벌개미취가 자취를 감출 무렵에 유독 향기 짙은 작은 꽃인 산국(山菊)이나 감국(甘菊)에서 아버지를 떠올린다. 요즘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색색의 개량국화들은 꽃도 크고 아름답다는 사치를 부리지만 천둥과 무서리를 이겨낸 이 향기가 없다. 도회지의 날렵한 사냥꾼이 되어 갈수록 손에 잡히지도 않는 아버지의 향기와 겹치는 이 국향(菊香)을 가을만 되면 되찾고 싶어 안달한다. 아무래도 가을에는 “괴로움과 혼돈이 꽃피는 고요에로 거두어들여진 순간을 상징하는” 시간들이 쌓인다.

어느새 담쟁이덩굴이 붉게 물들었다! 정현종 시인은 “살 만하지 않은가, 내 심장은/ 빨간 담쟁이덩굴과 함께 두근거리니!”라고 노래한다. 15년 전 파주 출판도시에 나남 사옥을 완공했다. 북쪽 면은 들녘의 찬바람을 막기 위해 거대한 콘크리트 성벽이 되었다. 현대식 건물이라고 자랑하는 건축가를 뿌리치고 이곳에 담쟁이를 심었다. 이젠 담쟁이의 힘찬 푸르름이 이 회색 벽면을 거의 뒤덮으며 주인이 되었다. 안도 다다오의 노출콘크리트 기법의 값비싼 다른 벽면도 마찬가지다. 넓은 담쟁이 잎들이 뿜어내는 붉은 가을의 단풍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의 희망을 떠올리는 소녀의 얼굴에도 가을이 묻어난다. 잎을 떨구고 나면 담쟁이덩굴은 그 뿌리의 흔적으로 세상 가장 큰 캔버스에 나목(裸木)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고 웅변한다. 나의 담쟁이 실천을 훔쳐보던 우리의 건축가는 어느 성당을 설계하고 신부님을 설득하여 벽면에 담쟁이를 심게 했다. 가끔 지나치다 그 성당의 담쟁이덩굴을 볼 때마다 나만의 가을을 확인한다.

조상호 나남출판ㆍ나남수목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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