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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20년, 아,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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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20년, 아, 민주주의

입력
2015.12.0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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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2월 3일, 전두환씨가 구속되었다. 오늘로부터 꼭 20년 전의 일이다. 언론은 전직 최고 권력자의 구속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했다. 전씨가 골목길에서 성명서를 읽은 후 귀향했다는 소식과, 곧바로 검찰 차에 실려갔다는 소식이 전파를 타고 삼천리 금수강산에 울려 퍼졌다. 수감되는 순간까지도 그의 정수리는 일해(一海)와 같은 빛을 뿜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우리는 비로소 군사독재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반짝임은 안양교도소의 어느 방 한 켠에 갇힐 것이므로. 총칼의 시대에 세워진 모든 것들이 차례로 무너지고 있었다. 아니,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다. 한강 다리나 백화점처럼, 마지막까지 사람을 짓뭉개면서.

권력의 구조 자체는 끝내 바뀌지 않았다. 국가의 모든 힘이 한 점(點)에 쏠려있었다. 문민정부는 독재를 가능케 했던 그 힘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대통령은 9시가 되자마자 뉴스에 나오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방송사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야단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떤 신문사는 대통령 가족의 비리 의혹을 보도했다가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 다른 신문사 기자들은 취재 도중 경찰에 얻어맞았다. 어떤 잡지사 기자는 검찰에 구속되었다. 궁금하지도 않은 김일성 소식이 매일 TV에 나왔다.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소식조차 탈북 귀순자 소식, 김일성 소식, 북한군 동향 다음으로 밀렸다. 그래도 보도가 나오기는 했으니, 어떤 말은 할 수 없었던 PC통신 게시판보다야 사정이 나았다.

백골단의 곤봉은 방망이 깎던 노인이 공들여 다듬은 것마냥 단단했다. 그게 학생들의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여기저기서 피가 튀고 불길이 솟았다. 곤봉 든 사람들이 대학 캠퍼스를 5일 동안 포위한 끝에 거의 6,000명에 달하는 학생들을 연행해갔다. 부상자가 전ㆍ의경과 학생들을 합쳐 3,000명 가까이나 되었다. 나이 어린 의경 한 명은 감았던 눈을 다시 뜨지 못했다. 권력에 숨통이 막힌 언론은 폭력ㆍ과격 시위를 성토하는 합창단이 되지 않기가 어려웠다. 애초에 누가 무슨 권리로 집회를 금지하고 원천봉쇄할 수 있느냐는 질문마저 합창소리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매년마다 대학 등록금이 10%씩 오르기 시작했다. 과반을 차지하던 학생단체가 흩어졌으므로, 등록금이 오르지 못할 까닭은 없었다.

사과상자 안에 무엇인가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정관계 핵심인사들이 그 상자를 열었다. 상자를 열었더니 사랑, 우정, 믿음, 행복, 건강이 모두 날아가고 돈뭉치만 남았다. 그래도 그들은 돈뭉치로 만족했다. 지금은 사라진 어느 재벌기업은 사과상자를 돌린 대가로 천문학적인 액수의 특혜 대출을 받았다. 그 기업을 몇 번이나 팔아도 갚지 못할 대출이었다. 오고 가는 비리 속에 싹튼 부실이 어찌나 컸던지 문자 그대로 나라를 말아먹을 정도였다. 한보그룹이 부도가 난 뒤 1년이 채 되지 않아 대한민국은 IMF의 족쇄를 차게 됐다. 그 사이에 망하거나 법정관리 절차에 들어간 재벌기업이 10곳이 넘었다. 작은 기업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것을 민주주의라고들 했다. 대통령을 체육관 대신 투표소에서 뽑는 민주주의였다. 그렇게 뽑힌 대통령은 손짓 한 번에 쓰레기 종량제를 불러올 수도, IMF를 불러올 수도 있는 절대권력이 되어 국민 위에 군림했다. 이런 민주주의는 언론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민주주의, 검열 없이 국민이 스스로 말하는 민주주의, 차가운 한강 물에 32명의 사람이 빠져 죽지 않는 민주주의, 집회ㆍ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정신이 살아 숨쉬는 민주주의, 권력자와 권력자의 가족이 부패하지 않는 민주주의, 기업인이 뇌물을 뿌리는 대신 혁신과 투자에 나서는 민주주의, 칼국수처럼 나라를 빨아먹지 않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권력의 구조가 과거와 같다면 누구를 선출해도 과거와 같게 마련이다. 그런 민주주의는 20년 전으로 충분하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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