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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출판사 첫 책] ‘우리 시대의 몸·삶·죽음’ (2010)

입력
2016.03.04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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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을 하겠다고 겨우 한 해 논밭을 기어 다니다 대구로 돌아와 차린 출판사. 그러나 막막했다. 누가 원고를 준단 말인가. 치밀한 준비도 야심도 없이 2010년 봄에 문을 연 출판사는 지루한 여름을 보내야 했고, 가을 바람이 불어올 무렵에야 드디어 한 편의 원고를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이 한티재의 첫 책 ‘우리 시대의 몸ㆍ삶ㆍ죽음’이다. 저자인 김진국 선생은 신경과 전문의이기도 하지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지역 언론에 칼럼을 연재하는 등 사회의 주요 이슈들에 대해 꾸준히 글을 써온 분이다. 거대한 자본 앞에 무력한 의료계의 실상을 고백하고, 의학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어 온 건강과 생명, 죽음과 몸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한 글은 우리 출판사의 첫 책으로 과분할 만큼 반가운 원고였다. 또한 엄청난 독서량을 바탕으로 풍부히 인용된 문학 작품들은 의료 현실의 문제를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는 신선한 접근이었다.

책을 만들면서 행복했다. 내 모든 능력과 정성을 다하고 싶었다. 예쁘기만 한 디자인이 아니라, 내용에 걸맞은 신뢰를 주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 각주도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하고, 인용된 책들 중 가지고 있지 않은 책은 모두 사서 읽어보고 원고와 대조했다. 인용 작품들의 저작권을 확인하면서 작가에게 직접 연락을 해야 하기도 했다.

대형 출판사의 편집부 직원일 때는 생각도 못 했던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책의 판형은 어떻게 할지, 본문 종이와 표지 종이는 무엇을 쓸지, 수십 권의 책을 펴보며 고민했다. 본문은 어떤 서체를 쓸 것인지, 한 페이지에 몇 행을 넣을지, 제목과 부제는 무어라 할지, 그리고 인쇄소와 제본소는 어디와 거래할지…. 책이 나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내가 판단하고 결정해야 했다.

드디어 표지를 인쇄하는 날, 일찍부터 인쇄소에 가서 기다리다 받아 든 표지를 보고는 눈앞이 캄캄했다. 표지에 넣은 사진을 너무 옅게 만든 탓에 모니터에서는 보이던 꽃잎들이 인쇄물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인쇄기를 멈추고, 출력소로 뛰어가 표지 데이터를 수정하고, 필름을 다시 출력해서 인쇄소로 뛰어오고, 모자란 종이를 급히 다시 주문하고. 그렇게 첫 책이 나왔다. 고맙게도 첫 책이 전국 일간지에 소개도 되고, 시사주간지에는 저자의 인터뷰도 실렸다. 목돈이 없는 출판사를 위해 제작비까지 보탠 저자, 열심히 소문을 내주고 책을 팔아준 이웃들, 그리고 신생 출판사의 책을 믿고 사준 독자들 덕분에 무사히 첫 해도 넘길 수 있었다.

그 후 한 해 한 해 버티며 이만큼 왔다. 땀 흘리며 일하는 이웃들의 삶이 담긴 책, 지역에서만 나올 수 있는 지역의 이야기가 담긴 책, 좀더 나은 세상을 위해 용기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 그런 책을 만들 수 있는 한티재가 되도록 첫걸음을 도와준 우리 저자와 독자들, 그리고 그렇게 나온 첫 책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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