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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감정을 통해 젊음ㆍ늙음을 강렬하게 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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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감정을 통해 젊음ㆍ늙음을 강렬하게 규명

입력
2016.08.26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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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위의 여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배수아 옮김

시공사 발행·340쪽·1만3,500원

영혼의 노화는 육체의 그것만큼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일을 겪어버렸다는 탈진의 느낌, 그 무엇도 달라질 수 없으리라는 체념의 정조가 영혼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하게 누구도 스스로를 더 이상 젊은이라고 여기기 어려워진다. 사랑이 젊음의 일인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 때문이다.

‘책 읽어 주는 남자’의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신작소설 ‘계단 위의 여자’는 감정의 고고학자라는 작가의 별명답게 젊은 날의 강렬했던 사랑을 발굴하기 위해 탐사를 떠나는 한 노인의 이야기를 그린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젊음과 늙음이 무엇인지 섬세하고 강렬하게 규명하며, 인물의 매력으로 무섭게 독자를 빨아들이는 소설이다.

젊고 야심만만한 변호사였던 ‘나’는 40여 년 전 의뢰인의 여자에게 반해 생을 거의 내던질 뻔한 적이 있다. 훗날 세계적 아티스트가 되는 화가와 거물 기업가가 그림 한 점의 소유권을 놓고 치열한 법적 다툼을 벌이는데, 그 그림 속 나신의 여인이 바로 이레네, 출세가도를 달리는 것 외에 관심이 없던 ‘나’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여인이다. 기업가 쿤트라흐는 트로피 와이프였던 이레네의 아름다운 나신을 화가 슈빈트에게 그려달라고 맡기고, 슈빈트는 벗은 몸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레네의 그림을 그리면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뮤즈와 눈이 맞는다. 쿤트라흐는 배신한 아내에 대한 분노로 그림을 자꾸 훼손하고, 일생일대의 작품을 연적의 손에 넘겨준 슈빈트는 이 작품의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나’를 찾아온다.

총 3부로 구성된 소설에서 스릴러의 형식으로 내처 달리는 1부는 사랑과 질투, 배신과 상처, 매력과 회한으로 들끓는 도가니와도 같다. 아내를 되돌려주면 작품을 넘겨주겠다는 쿤트라흐의 제안에 슈빈트가 결국 넘어가고, ‘나’는 의뢰인에 대한 신뢰 의무를 저버리고 이레네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린다. “우리는 클리셰를 사랑해요. 왜냐하면 그것이 맞으니까”라는 이레네의 말처럼 또 다른 클리셰가 된 ‘나’는 감출 수 없는 사랑을 애송이처럼 고백해 버리고, 두 남자 모두에게서 벗어나려는 이레네의 범죄 계획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 하지만 그림을 빼돌린 후 ‘나’에게 오겠다던 이레네는 ‘나’에게도 오지 않는다.

그림과 함께 사라진 이레네가 남긴 수치스런 상처를 곧장 기억에서 몰아내버린 ‘나’는 40여 년간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훌륭한 아내와 결혼해 세 자녀를 버젓하게 키우며 대형 로펌의 대표가 된 ‘나’는 호주 출장 중 우연히 들른 갤러리에서 그 그림을 다시 보기 전까지 완벽한 삶의 주인공이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 왜 기다리던 내게 오지 않았는지 물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질문이 돌연 성공한 노신사의 내면을 강타하고, 오랜 망설임 끝에 ‘나’는 감정의 고고학적 탐사를 감행한다.

이레네가 겪었던 많은 일들을 통해 독자는 산다는 것과 동의어인 늙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탈진에 가까울 정도로 핍진하게 체험하게 된다. 동독에 어린 딸을 남겨둔 채 자본주의 세계로 뛰어들었고, 혁명을 꿈꾸며 좌파 테러단체에 몸담았으며, 트로피 와이프도, 뮤즈도, 왕자가 구출해주는 고난에 빠진 공주 역할도 싫어 호주로 홀로 도망쳐, 전기도 통하지 않는 작은 섬에서 가난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돕는 삶을 살다가, 지독한 질병의 냄새를 풍기며 늙은 여인이 되는 것. ‘그때 우리가 사랑했더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상상의 서사를 길게 써내려 가는 이 늙은 연인의 모습은 아련하고 애잔하여 서글프다.

“젊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되리라는 느낌이에요. 틀어지고 어긋나버린 모든 것이, 우리가 놓쳐버린 모든 것이, 우리가 저지른 모든 잘못이. 더 이상 그런 감정이 없다면, 한 번 일어나버린 일과 한 번 경험한 일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면, 그러면 우리는 늙은 거예요.” 미칠 듯 ‘나’를 매혹하던 젊은 날의 이레네는 말했었다. 40년이 지난 후 상상으로 뒤바꾸는 삶의 서사. “내 가슴은 연민으로 에이듯 아팠다. 그녀를 향한,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한 연민. 우리는 늙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아득한 과거가 되었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책 읽어주는 남자'로 유명한 판사 출신 독일 소설가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43세에 친구와 즉흥적으로 소설을 써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돼 작가가 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책 읽어주는 남자'로 유명한 판사 출신 독일 소설가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43세에 친구와 즉흥적으로 소설을 써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돼 작가가 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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