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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우리가 노벨과학상을 못 받는 이유

입력
2015.10.1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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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노벨상 수상자 발표를 지켜보는 심사는 편하지가 않다. 중국은 자국 국적의 최초 과학상 수상자를 냈고 일본은 의학상, 물리학상에서 이틀 연속 수상자를 냈다. 특히 물리학 분야는 지난해에 이어 2연패를 한 셈이다.

입자물리학을 전공하는 과학자로서 말하자면, 1998년 중성미자 진동 현상을 처음으로 확인한 일본의 슈퍼 가미오칸데 연구진은 그날로 이미 예약해 놓은 노벨상을 이제야 가져간 것과도 같다. 슈퍼 가미오칸데 실험이 시작될 때부터 과학자들은 이 실험이 노벨상 감이라는 데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2008년 고바야시와 마스카와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안긴 일본 고에너지연구소의 벨(Belle) 실험도 마찬가지이다. 이 실험은 3세대 쿼크가 포함된 입자의 성질을 연구하는 실험으로서, 처음으로 3세대 쿼크를 도입해 쿼크들 상호간의 섞임을 연구한 고바야시와 마스카와의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벨 실험은 일본 정부가 고바야시-마스카와에게 확실히 노벨상을 안기기 위해 전폭 지원한 프로젝트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경계 넘지 못하게 막는 ‘주입식 교육’

일본의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 우리는 노벨과학상을 받지 못할까? 당연한 말이겠지만,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연구를 하지 않거나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연구란 과연 무엇인가?

사실 과학자들은 노벨상을 받기 위해 연구를 하지 않는다. 상은 연구의 결과로 주어질 뿐이다. 과학 연구는 인간 지성의 경계를 넓히는 일이다. 그 경계를 한 뼘이라도 더 넓히는 것이 과학자의 보람이다. 따라서 경계를 크게 넓힌 연구일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다. 노벨상은 이런 연구 결과에 수여된다.

여기서 첫 번째 문제가 생긴다. 한국의 과학교육은 대체로 기존의 과학 체계가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다운지를 먼저 가르친다. 반면 선진국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 지금 체계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먼저 가르친다. 지식의 경계를 확인하고 넓히는 데에는 후자의 방식이 훨씬 유리하다. 그래서 선진국의 과학자들은 기존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새로운 영역을 확보하는 일에 능하다.

오무라 사토시(大村智·80) 일본 기타사토(北里)대 특별영예교수가 5일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직후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무라 사토시(大村智·80) 일본 기타사토(北里)대 특별영예교수가 5일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직후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에서는 그렇게 남이 만들어 놓은 규칙 속에서 주어진 문제풀이만 잘하는 인력을 키워왔다. 그 결과 한국 과학계에는 새로움에 대한 ‘원초성(originality)’이 부족하다. 노벨상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기존의 경계 안에서 아무리 문제를 잘 풀어봐야 의미가 없다. 노벨상은 대체로 기존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규칙을 만든 업적에 수여된다. 즉, 노벨상은 원초성에 주는 상이다.

흔히 말하는 주입식 교육, 창의력 말살 교육에서는 당연히 원초성을 확보할 수 없다. 최근에는 또 하나의 요소가 추가되었다. 바로 영어 강의이다. 언론사나 교육 당국이 대학을 평가할 때 글로벌 지표라며 들이미는 영어 강의로는 경계를 넘어서는 훈련을 할 수 없다. 창의적인 생각은 절대 영어로 떠오르지 않는다. 영어 강의를 강요하는 언론이나 교육 당국은 적어도 노벨상 운운할 자격이 없다.

경제 효과만 따져선 도약 불가능

둘째로, 기초과학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매우 낮다. 수치로만 보자면 한국의 연구개발(R&D) 지출은 2012년의 경우 국내총생산(GDP) 대비 4.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OECD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부가 생각하는 기초과학과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기초과학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정부의 기초과학’은 로열티를 받을 수 있는 원천기술에 가깝다. 그래서 무슨 연구를 하든 보고서에는 산업유발효과나 경제적 기대효과 등을 써야 한다. 하지만 중성미자 진동 같은 실험에 무슨 산업유발효과나 경제적 기대효과가 있겠는가.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기초과학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기에 기존의 산업적ㆍ경제적 잣대를 들이댈 대상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노벨상은 당장의 산업적ㆍ경제적 효용보다 인간 인식의 경계를 넓힌 원초성에 더 무게를 둔다.

한편 어떤 이는 우리 처지에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기초과학보다 당장의 먹거리를 해결해 줄 응용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후진국을 벗어나 한참 개발도상에 있을 때는 이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선진국 진입을 원한다면 기초과학은 포기할 수 없는 옵션이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양자역학을 이해하고서 반도체를 만드는 것과 모르고 만드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지금의 공정기술을 뛰어넘어 나노미터 이하로 내려가면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세상이 나타난다. 이미 초보적인 ‘양자컴퓨터’가 구글 등의 초일류기업에 도입되고 있는 실정이다. 본격적인 우주산업의 시대가 열린다면 일반상대성이론을 모른 채 감당할 수 있을까?

한둘에 ‘올인’일그러진 인재 양성

셋째,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할 제대로 된 시스템이 없다는 점이다. 정부의 지원은 결국 사람에 대한 투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때의 사람이란 특정한 한두 명을 말하는 게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해당 분야의 고급 인력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하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적 흐름의 ‘동적 평형상태’를 만들어야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지나도 연구 프로젝트가 지속되면서 성과가 쌓인다.

그런데 한국은 노벨상 받을만한 한두 명한테만 ‘올인’하려고 한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투자가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투기이자 도박이다. 마치 제2의 김연아나 이세돌이 태어나기만을 기다리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1977년 비운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를 떠올린다. 나는 이휘소 박사가 살아 있었다면 1979년이나 1999년에 노벨상을 수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휘소 박사는 한국인 이휘소라기보다 미국인 벤자민 리이다. 무엇보다, 한국 땅에서 한국의 인프라 속에서 성취한 결과가 의미 있을 뿐이다. 미국이 한국의 이휘소를 데려가서 세계적인 과학자로 키운 것처럼, 우리도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의 인재를 데려다 세계적인 과학자로 키울 수 있을까? 며칠 전 화성에 소금물이 흘렀다는 강력한 증거를 찾아 낸 주역은 네팔 출신의 연구원이었다. 지금의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인재 양성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 없다 보니, 다들 우리는 왜 노벨상 못 받느냐고 한탄을 하면서도 대학에서 물리학과가 사라지는 현상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보도에 따르면 대학정보 공시 사이트에 보고된 161개 대학 중 수학과는 58개, 화학과는 61개, 그리고 물리학과는 겨우 47개에 불과했다. 이쯤 되면 왜 우리는 노벨과학상을 못 받느냐는 질문 자체가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노벨과학상은 ‘퍼스트 무버’의 잣대

해결책은 없을까? 우선 한국의 기초과학이 대단히 심각한 상황임을 사회 전체가 인식해야 한다. 한국에서 기초과학 종사자들은 한 마디로 말해 멸종에 직면한 천연기념물이다. 천연기념물은 법으로 지정해 보호해야 한다. 나는 우선 기초학문특별법이라도 만들어서 돈도 못 벌고 산업적 가치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천연기념물을 국가가 나서서 보호ㆍ육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초과학이 발전하려면 그걸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자생력이 생기고, 노벨상이 나온다.

둘째, 기초과학에는 그 자체의 논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경제 논리나 산업 논리와는 전혀 다르다. 노벨상은 경제ㆍ산업 논리가 아니라 과학 자체의 논리에 따라 정해진다. 예컨대, 기초과학에 들어가는 돈은 ‘투자’가 아니다. 오히려 버리는 것에 가깝다. 인간 지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원초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당하게 지불해야만 하는 절대비용이라는 뜻이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천연기념물을 보호한답시고 갖다 버릴 돈이 어디에 있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지난 이명박정부가 남긴 훌륭한 교훈 중의 하나는 5년 동안 강바닥에 22조원을 쏟아 부어도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점이다. 결과가 불투명한 자원외교에 쓴 돈이 35조원이 넘는다. 매년 1조원씩 57년을 쓸 수 있는 돈이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의 기초가 된 일본의 슈퍼 가미오칸데는 총예산 약 4,000억원짜리 실험이다. 지난 2012년 힉스 입자를 발견한 유럽의 대형강입자충돌기에는 10조원 정도 들었다. 단언하건대, 기초과학에 매년 1조원씩 돈을 갖다 버린다면 57년이 되기 전에 한국에서 노벨상은 확실하게 나온다. 돈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그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닌지 먼저 자문해야 한다.

노벨상은 사실 안 받아도 그만이다. 그러나 ‘노벨과학상 수상자 0명’에 담긴 의미를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의 참담한 현실이 반영된 숫자이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동안 산업화에 성공한 한국의 전략은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였다. 빠른 추격자에게는 원초성이 필요 없다. 지금 수준으로 계속 살겠다면 원초성 따위 전혀 없는 추격자에 만족해도 된다. 노벨상이 없다고 한탄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지향한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기초과학을 살리는 일은 그저 상 하나 받느냐 못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곧 현실이 될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이다.

이종필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BK사업단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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