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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커버스토리] 과대망상 심벌서 자유정신 아이콘으로 변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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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커버스토리] 과대망상 심벌서 자유정신 아이콘으로 변화 중

입력
2015.03.06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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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엉뚱함의 대명사로, '무모한 인물'의 이미지로 굳어져

달라지는 평가, 이상 좇는 도전·신념에 갈채

올해 완간 400년을 맞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유구한 세월 동안 끊임없이 세상에 영감을 줬다. 19세기 프랑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돈키호테 속에서 자신의 근원을 발견했다”고 했다. 돈키호테의 이미지는 문화마다 제 각각이다.

‘돈키호테는 시골길을 지나다 30, 40개나 우뚝 서있는 풍차를 발견하고 “괘씸한 거인들”이라며 로시난테를 타고 돌진한다. 무서운 힘으로 돌아가는 풍차의 날개를 찌른 창은 박살 나고, 동시에 사람과 말도 휩쓸려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떨어졌다.’(디딤돌 7차 개정판 고교문학 교과서 요약)

서양에선 “인간을 함몰시킬 미래의 거인에 대항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무모한 과대망상 이미지로 기억된다. 노무현 정부의 수도 이전과 국가보안법 폐지,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운하,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진주의료원 폐업이 죄다 ‘돈키호테적 발상’으로 국회에서 질타를 받았다. 정운천 전 농림부 장관은 2011년 구제역으로 살처분된 가축 사체를 재활용해 비료로 쓸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다 돈키호테 소리를 들었다. 폐가금류를 퇴비 등 다목적용으로 자원화한 사례가 있었지만 엉뚱한 발상으로 내몰렸다. 돈키호테는 우리 사회에서 부정어다.

돈키호테에 대한 평가가 왜 박하게 된 것일까. 학자들은 최초 번역에서 원인을 찾는다. 돈키호테가 이 나라에 처음 번역 소개된 것은 1915년 육당 최남선에 의해서다. 100년 전이다. 그런데 일본어판을 중역하다 보니 풍차와의 모험, 양떼와 싸우는 모험 등 10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만 집중해 소개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돈키호테를 완역한 안영옥 고려대 서어서문학과 교수는 “육당이 잡지 ‘청춘’ 에 돈기호(頓基浩)전기로 소개했으나 하인 산초를 ‘범보(範甫)’로 의역하는 등 내용뿐만 아니라 호칭까지도 깊이 없이 재미로만 중역하다 보니 ‘정신 나간 기사’ 이미지가 굳어진 것”이라며 “서구처럼 돈키호테 정신을 깊이 이해할 여유와 학자 또한 없다 보니 이를 바로잡지 못했다”고 말했다.

과대망상과 무모함의 포장 속에 담긴 돈키호테의 꿈과 이상, 저돌성, 자유 정신은 시대를 관통한다.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내레이션을 한 1997년 애플 광고 ‘Think Different’는 이를 잘 형상화했다. ‘네모난 구멍에 맞춰진 동그라미처럼 사회부적응자, 반항아, 문제아지만 그들은 세상을 다르게 본다. 그들이 미쳤다고 한다. 뭐라고 평가하든 그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이 세상을 바꾸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지금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5년 뒤엔 사람들이 우리의 결정을 이해한다”고 했다. 혁신의 아이콘들이 한 말은 ‘위대하신 여러분, 장차 이룩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내가 미친 거요, 세상을 있는 그대로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미친 거요?’라고 외치는 돈키호테의 카피본에 지나지 않는다.

정체된 사회 분위기, 시대변화에 뒤처진 조직문화의 효율성이 한계에 이른 이 사회에서 돈키호테적 이상이 갖는 함의는 적지 않다. 김현종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은 “성장동력을 키우기 위한 기술개발(R&D), 융합형 신규사업 발굴, 해외시장 개척 등을 위해선 역발상의 아이디어를 가진 돈키호테형 인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기순 한ㆍ스페인 문화교류센터장은 “내가 하고 싶은 삶을 사는 이에게는 좌절도, 상대적 박탈감도 있을 수 없다”며 “남의 시선만 생각하는 이 시대에 던지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돈키호테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숱한 싸움에서 이겨본 적이 거의 없지만 불굴의 투지를 보였다. 그러나 후편에서 기사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고 제 정신으로 돌아오는 순간 우울증에 빠져 숨을 거둔다. 질서를 중시하는 이 사회와 기업, 교육 현실에서 돈키호테가 살아남을 토양을 찾기가 쉽지 않다. 19세기 러시아 문호 이반 투르게네프가 인간형을 돈키호테와 햄릿으로 구분한 것에 비춰보면 질서를 깨뜨리는 새로운 사고와 발상을 용인하지 않는 우리 풍토에서 심사숙고의 햄릿들만 넘쳐난다. 현실의 풍차 앞에서 이상을 잃고 부적응자로 도태된 돈키호테들이 숱하게 많다. 엉뚱한 발상과 행동의 이면에 있는 이상과 신념, 진지함의 1할만이라도 이해하고, 관대할 수 있다면 사회는 훨씬 나아질 것이다. 한국외대 총장을 지낸 박철 세르반테스연구소 이사장은 “세상을 변화시킨 원동력은 돈키호테형 인간이었다”며 “우리 사회가 보다 나아지기 위해서는 돈키호테형 인간에 대한 관용과 포용의 자세, 토양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박관규기자 ac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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