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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노트] "동화·만화·타로카드… 앨리스 자료 300여 종 20년째 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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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노트] "동화·만화·타로카드… 앨리스 자료 300여 종 20년째 수집"

입력
2015.02.05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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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출간 150주년…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초판에 실린 존 테니얼의 앨리스 그림 ⓒJohn Tenniel
초판에 실린 존 테니얼의 앨리스 그림 ⓒJohn Tenniel

“내일도 주고 어제도 주지만 오늘은 절대 주지 않는 것이 규칙이야.”

“오늘 주는 경우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앨리스는 반박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 잼은 이틀에 한 번씩이야.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오늘은 이튿날이 아니지.” 여왕이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너무 헷갈려요.” 앨리스는 말했다.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 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동화 같지 않은 동화다. 꿈과 환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동화에 응당 있어야 할 계도의 흔적이 없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말장난의 향연은 어떤 가르침도 주지 않고 무의미와 무질서의 극단으로 치닫는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책은 결국 다른 이들의 입을 열게 만든다. 버트런드 러셀, 화이트 헤드를 비롯해 많은 철학자들이 앨리스 텍스트에 담긴 의미를 다각도로 분석했고 T.S. 엘리엇, 제임스 조이스, 에드먼드 윌슨 등 난해한 작품으로 정평이 난 작가들이 앨리스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올해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출간된 지 150주년이 되는 해다. 토끼굴 아래로 떨어진 앨리스 앞에 놓인 유리병의 ‘나를 마셔요(Drink me)’라는 글은 150년이 지난 지금도 보는 이의 가슴을 뛰게 한다. 마실 것인가, 말 것인가.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있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헌책방인 동시에 앨리스 자료의 보고다. 책방을 운영하는 윤성근씨는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거의 20년 간 앨리스에 관한 자료라면 닥치는 대로 모아온, 이른바 ‘앨리스 덕후(오타쿠)’다. 구경 좀 시켜달라고 찾아간 기자 앞에 윤씨는 큰 박스 세 개를 끌고 왔다. 동화, 만화, 그림, 퍼즐, 레코드 판, 타로카드, 문제집으로 화한 앨리스가 다양한 국적의 얼굴을 가지고 거기에 있었다. 어딘지 예민해 보이는 푸른 눈의 프랑스 판 앨리스, 치아를 모두 드러내며 상업적으로 미소 짓는 디즈니 판 앨리스, 지브리 스튜디오 풍의 일본 판 앨리스, 일곱 살이 아니라 스물일곱 살쯤 돼 보이는 스페인 판 앨리스. 윤씨는 한국엔 자료가 많지 않다며 대부분 유럽이나 일본에 갔을 때 사 모은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에 다닐 때 앨리스를 원서로 읽었는데 어릴 때 봤던 그 이야기가 아니더라고요. 풍부한 언어유희와 운율에 빠져서 수집을 시작했어요.”

수집가의 피를 타고난 윤씨가 눈독들인 것은 앨리스뿐이 아니다. 소싯적에는 심슨 가족, 만년필, 구두, 벨트 등에 눈이 멀어 보이는 족족 사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피 말리는 수집의 험로에 지친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앨리스에 집중하기로 했단다. 지금까지 모은 것만 300여종. 수집품 중에는 1962년 계몽사에서 출간된 ‘세계소년소녀문학전집 영국편 - 이상한 나라의 애리스’(한낙원 역)도 있다.

계몽사가 1962년 출간한 '이상한 나라의 애리스'
계몽사가 1962년 출간한 '이상한 나라의 애리스'

기록 상 앨리스의 첫 한국어 번역본이 나온 것은 1959년이지만, 실물이 확인된 것 중 가장 오래된 책은 1962년 판이다. 윤 씨는 이 책을 어느 책수집가의 집에서 발견했다. 집에 들러 원하는 책을 골라 사가라는 청에 수집가의 집을 방문한 윤씨는 수천 권의 책 가운데 얌전히 꽂혀 있던 앨리스를 단박에 발견했다. 그리고 불꽃 튀는 신경전이 이어졌다.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책을 발견했을 때 기억해야 할 첫 번째 수칙은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할 것’이다. “수집가들이 책을 살 때 아무 의미 없이 사는 경우는 없어요. 뚜렷한 이유와 애착을 가지고 모은 것이고, 그 가치를 상대방도 알고 있다는 걸 눈치 채는 순간 가격이 치솟죠.” 애써 앨리스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어물거리던 윤씨는 결국 앨리스를 기준으로 좌우상하 수백 권의 책을 모조리 샀다.

반면 너무 비싸 만져보고도 돌아설 수 밖에 없었던 앨리스도 있다. 일본 서점을 방문했을 때 윤씨의 눈길을 붙든 것은, 책이 처음 출간된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나온 앨리스였다. 책에는 루이스 캐럴의 친필 서명이 있었는데 그가 늘 사용했던 보라색 펜의 푸른 기운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40만엔이라는 가격에 윤씨는 눈물을 머금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이상한나라의헌책방 사장이자 앨리스 수집가인 윤성근씨. 20년간 모은 300여 종의 앨리스 관련 자료를 보기 위해 일반 독자뿐 아니라 연구자들도 그의 책방을 찾는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k.co.kr
이상한나라의헌책방 사장이자 앨리스 수집가인 윤성근씨. 20년간 모은 300여 종의 앨리스 관련 자료를 보기 위해 일반 독자뿐 아니라 연구자들도 그의 책방을 찾는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k.co.kr

윤씨가 앨리스 수집에 열 올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삽화다. 초판을 장식한 존 테니얼의 맹랑한 앨리스는 아서 래컴의 손을 거치며 좀더 서정적인 앨리스로 바뀌었고 이후 앨리스 그리기는 전세계 예술가들의 도전 과제가 됐다. 윤씨의 책방에도 핀란드 만화 ‘무민’의 작가 토베 얀손, 일본 미술가 쿠사마 야요이, 영국 일러스트레이터 헬렌 옥슨버리, 한국의 그림책 작가 이수지씨 등이 그린 앨리스가 있다.

앨리스가 토끼굴로 떨어진 지 150주년이 되는 해지만 아쉽게도 한국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행사나 학회 소식이 없다. 미국과 유럽, 가까이는 일본에도 루이스 캐럴 협회를 비롯해 수많은 동호회와 관련 민간단체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앨리스에 대한 한국의 관심은 낮은 편이다. 캐럴의 또 다른 책 ‘실비와 브루노’(1889)가 최근 완역된 것만 봐도 그렇다.

윤씨는 한국의 손꼽히는 ‘앨리스 덕후’로서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소규모 전시를 기획해보려고 했으나 1860년대 초판이 없어 망설이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아동물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인 것 같아요. 앨리스는 책 속 대사 한 줄을 가지고도 논문이 나올 정도로 많은 수수께끼를 품고 있는 책이에요. 그 의미가 더 풍성하게 공유되면 좋겠어요.”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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