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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두리] “보아텡이 옆집에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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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두리] “보아텡이 옆집에 살았으면 좋겠다”

입력
2016.06.2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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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일보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축구 지도자 연수 중인 차두리(36)의 칼럼 ‘차두리의 유로話’를 연재한다. 유로話는 프랑스에서 열리고 있는 유럽 축구선수권대회 ‘유로 2016’에 대한 이야기다. 독일과 스코틀랜드 리그에서 오랫동안 선수로 활약한 차두리가 직ㆍ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는 선수들의 이야기, 그리고 지도자를 준비하며 느낀 또 다른 축구의 세계를 그려갈 예정이다.

“Ich wunsch mir einen Nachbarn wie Boateng.”(나에게 보아텡 같은 이웃이 있었으면 좋겠다)

축구 지도자가 되기 위한 밑바닥 과정이 끝났고 시험도 무사히 마쳤다.

11일(한국시간) 개막한 유로 2016에서 조별리그를 통과할 팀의 윤곽도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진지하게 외우고 공부하고 리포트를 써봤다. 비어있던 머리를 채우느라 책 속에 파묻혀 지내면서도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축구 생각에 몸과 마음이 근질근질해서 혼났다.

이제 끝났다.

축구를 맘껏 볼 수 있다. 보고 또 보고 재방송도 보고 삼방도 볼 것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지도자 공부를 하고 있는 차두리가 함께 교육받는 동료들과 수업을 마친 뒤 단체 사진을 찍은 모습. 차두리 제공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지도자 공부를 하고 있는 차두리가 함께 교육받는 동료들과 수업을 마친 뒤 단체 사진을 찍은 모습. 차두리 제공

축구를 보면서 팬들의 가장 뜨거운 관심은 뭐니뭐니해도 ‘누가 선발로 나갈 것이냐’와 ‘어떤 전술로 상대하고 싸울 것이냐’는 감독의 권한에 참견하는 것이다.

이거 정말 재미난다.

물론 아주 가끔은 감독의 선택이나 안목을 칭찬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팬들은 ‘나도 그만큼 할 수 있다’거나 ‘내 생각이 감독에게 전달되면 큰 도움이 될 거야’라는 행복한 착각(?)을 하곤 한다. 그래도 나는 비교적 감독의 판단에 리스펙트(존경심)를 보내는 착한 팬이다. 진심이다. ㅋ.

하지만 축구 최고의 축제에 해당하는 유로 2016을 앞두고 멍청한 정치인의 멍청한 한마디로 온 나라가 분노에 빠졌다.

“사람들은 보아텡을 축구 선수로는 좋게 생각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아텡을 옆집에 사는 이웃으로는 원하지 않는다.”

☞ 관련기사: 축구선수 인종차별 발언 역풍 맞은 獨 극우정당

유럽 축구 팬들은 최근 연이은 테러 때문에 공포에 떨었고 평가전(작년 11월 독일과 프랑스의 경기)에서 운동장에 갇히는 끔찍한 경험까지 했다. 이번 유로 2016을 앞두고 많은 우려가 나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틈을 타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너무 어이가 없다. 이제 독일 사람들은 더 이상 트럼프(미 공화당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를 욕할 수도 비웃을 수도 없게 됐다. 아니면 욕해줄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축구 팬들뿐만 아니라 축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나는 보아텡 같은 이웃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반대 구호를 펼침막으로, 손 편지로, 메시지로 남기고 붙이고 보여주면서 가우란드 ‘독일을 위한 대안(AfD)’ 부대변인에게 화를 내고 있다.

가우란드 AfD 부대변인이 보아텡을 향해 최근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자 독일 팬들은 ‘보아텡은 우리의 이웃이다’는 현수막을 펼치며 가우란드의 발언을 강력히 비판했다. 빌트 트위터 캡처
가우란드 AfD 부대변인이 보아텡을 향해 최근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자 독일 팬들은 ‘보아텡은 우리의 이웃이다’는 현수막을 펼치며 가우란드의 발언을 강력히 비판했다. 빌트 트위터 캡처
스벤 패트케 의원이 보아텡 유니폼을 입고 의회에 등장, 알렉산더 가우란드(오른쪽) 부대변인의 인종차별 발언에 항의했다. 출처 dpa
스벤 패트케 의원이 보아텡 유니폼을 입고 의회에 등장, 알렉산더 가우란드(오른쪽) 부대변인의 인종차별 발언에 항의했다. 출처 dpa

물론 ‘보아텡의 이웃’이라는 뜻이 보아텡 뿐 아니라 아랍인들을 포함한 모든 유색인종을 말하는 것이기를 나는 바란다.

보아텡은 이번 대회 조별리그 두 경기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확실히 증명했다. 그는 독일대표팀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붓는 헌신과 희생 정신도 보여줬다. 우크라이나와 첫 경기에서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날려 실점 위기를 넘겼고 폴란드와의 2차전에서는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인 레반도프스키의 완벽한 찬스를 태클로 저지했다. 팬들은 여기에 감동하고 있다. 축구를 하는데 피부색깔이나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나도 보아텡이 내 옆집에 살았으면 좋겠다. ㅋㅋㅋㅋ.

독일 국가대표 수비수 제롬 보아텡(오른쪽)이 지난 17일 폴란드와 유로 2016 C조 2차전에서 상대 레반도프스키의 공격을 막는 모습. 생드니=AP 연합뉴스
독일 국가대표 수비수 제롬 보아텡(오른쪽)이 지난 17일 폴란드와 유로 2016 C조 2차전에서 상대 레반도프스키의 공격을 막는 모습. 생드니=AP 연합뉴스

2014년 브라질월드컵 우승 당시 독일은 그야말로 여러 국적의 선수를 모아 놓았다. 뮬러와 노이어 같이 전통적인 독일 선수가 있는가 하면 보아텡처럼 뿌리가 아프리카인 선수, 클로제와 포돌스키처럼 폴란드인의 피가 흐르는 선수 그리고 외질과 케디라 등. 뿌리가 서로 다른 선수들이 하나가 돼 독일에 월드컵 우승컵을 안겼다. 그런 여러 국적의 선수를 독일 국민들은 사랑했고 그들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축구는 세상의 어떤 이벤트보다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이 있다. 나의 아버지 차붐은 자신이 골을 넣었을 때 온 나라가 하나되는 희열을 느꼈다고 종종 말씀하셨다. ‘내가 골을 넣으면 대한민국이 모두 일어났다’는 자랑도 하셨다. 축구를 하면서 비로소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을 수 있었고, 가지고 싶은 것도 가졌다는 아버지의 고백도 읽은 적이 있다. 어렸을 때 나는 그 글에 큰 감동을 받았고 존경심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오늘의 축구는 차붐 세대의 축구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폭격에 허물어진 길거리에서 맨발로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가장 쉬운 놀이가 축구다. 길들여지지 않은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선수들이 쏟아져 나오는 브라질의 축구를 보라. 역설적이게도 너무 가난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골목에서 하루 종일 축구 놀이만 하면서 이런 선수로 성장했다. 세계를 하나로 묶어준 미디어 덕분에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동시간에 같은 월드컵을 보고 다투고 싸우면서 하나의 주제로 대화할 수 있다. 아버지 시대의 축구도 위대했지만 오늘의 축구는 더 위대해졌으면 좋겠다.

남아공 월드컵 당시 차두리 선수. 루스텐버그=원유헌 기자
남아공 월드컵 당시 차두리 선수. 루스텐버그=원유헌 기자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 갔을 때 한국팀 연습장이 빈민가 근처에 있었다.

철망에 붙어선 현지 아이들이 민머리 헤어스타일 덕분에 단박에 나를 알아보고는 “차두리”라며 마냥 좋아했다. 훈련을 마치고 인터뷰를 하면서 “저 아이들을 보며 내가 축구 선수라는 게 참 행복했다”고 말한 기억이 있다. 그날 그 아이들에게 철망 너머로 공이라도 몇 개 던져 주고 올 걸 하는 생각을 오늘에야 해본다. 그 ‘이상한 정치인 아저씨’때문에 나의 유로이야기 시작이 이상해졌다.

다음부터는 이런 이야기는 안 할 것이다. 팬들과 함께 즐거운 축구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무래도 내가 응원하는 독일 팀에 관한 주제가 많겠지만 두루두루 공평하려고 노력할 테니 이해해 주시기를 바란다.

우리도 편견을 버립시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이번 대회를 지켜보고 자기 팀을 응원하면서 즐깁시다.

<차두리, 프랑크푸르트 크론베르크에서>

☞ 관련기사: 아이들과 함께 한 ‘차붐 부자’의 특별한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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