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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다시, 야만의 시절

입력
2016.10.0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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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권력에 의한 죽음에 애도는커녕

유족조롱 일삼는 무리 판치는 세상

상식과 예의, 품격부터 회복해야

지난 1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백남기 추모대회'에 참석한 고 백남기씨의 딸 백민주화씨. 시댁 모임 참석차 발리를 방문하느라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그는 부당한 비난까지 받아야 했다. 뉴시스
지난 1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백남기 추모대회'에 참석한 고 백남기씨의 딸 백민주화씨. 시댁 모임 참석차 발리를 방문하느라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그는 부당한 비난까지 받아야 했다. 뉴시스

“그땐 야만의 시절이었지.” 어린 후배들 앞에서 어쩌다 옛일을 돌이킬 때 종종 하던 말이다. 범죄자는 물론 피해자의 신상까지 탈탈 털어 밝히는 게 집요한 기자정신인 줄 알았던 시절, 차별은 기본이고 희롱과 추행이 만연했던 시절, 뭣이 중한지도 모른 채 혹은 알고도 비겁하게 인권침해를 당하고 저질렀던 시절…. 그래 봐야 다만 밥을 위해 온갖 모멸을 견뎌야 했던 약자들에 비하면 내가 겪고 본 일들은 야만 축에도 끼지 못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낡디 낡은 경험담을 들먹였던 이유가 있다. 그 야만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였음을,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그 무엇도 절대 깨지지 않을 반석이 아님을, 그러니 더 단단히 다져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책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그 알량한 웅변에는 적어도 너나없이 인권에 무지하던 무지막지한 야만의 시절은 벗어났다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고백하건대, 내가 어리석었다. 세상은 전진 기어만 있는 자동차가 아니었다. 얼마든지 더 나빠질 수 있고, 기어이 더 나빠졌다.

시작은 더 갖고 싶은 욕망만을 오롯이 드러내던 이가 권좌에 오르고부터였다. 21세기 판 ‘잘 살아보세’가 울려 퍼지며 무한경쟁의 시대를 열었고, 사회적 약자를 패자로 몰며 혐오하고 능멸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저 권좌를 차지하겠단 열망 말고 무얼 가졌던 것인 지 알 길 없는 이가 그 자리를 이어받고는 후진에 가속도가 붙었다. ‘갑질’은 일상이 됐고, 약자를 향한 극도의 혐오가 판을 치고 있다. 세월호 유족들이 다만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목숨 건 단식을 이어가던 광장에서 ‘어버이’니 ‘엄마’를 참칭한 자들이 짜장면을 시켜 아귀아귀 먹어대던 섬뜩한 광경을 잊지 못한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던 농민 백남기씨가 끝내 숨졌다. 쌀값 인상을 요구하는 집회에 참여했을 뿐인 농민이 헐거운 규정마저 어긴 경찰의 물대포 직사에 귀한 목숨을 잃었다. 정상적인 국가, 제 정신 가진 정부라면, 그가 세상을 버리기 전 철저한 진상조사로 책임자를 문책하고 사과하고 재발방지책을 마련했어야 한다. 독재정권 시절에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더라’는 궤변은 철퇴를 맞았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한가.

진상조사를 철저히 외면해 온 검경이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부검 시도에 매달리는 사이, 야차(夜叉)들의 활개가 시작됐다. 의료계가 한 목소리로 부당하다 지적했건만, 이들은 가족들의 연명치료 거부로 병사했다는 주치의의 억지 진단을 빌미 삼아 고인의 자녀들을 ‘부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로 고발하겠다고 나섰다. 고인의 둘째 딸이 시댁 모임에 참석하느라 외국에 갔다가 임종을 지키지 못한 걸 매도하는 극단의 몰상식에 새누리당 의원까지 가세했다. 당내에서조차 호응을 얻지 못한 여당 대표의 1주일 ‘단식 투정’(투쟁이 아니라 투정!)에 호들갑을 떨어대던 그들이다. 그 참혹한 모멸에 “부디 ‘사람의 길’을 포기하지 말아 달라”는 호소로 답한 유족들의 인내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대선이 1년여 앞으로 다가왔다. 법전에서 잠자던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 소환될 무렵, 안하무인이던 이들도 서둘러 목소리를 낮추고 허리를 숙일 것이다. 대권을 꿈꾸는 이들은 표심을 사로잡을 ‘시대정신’ 찾기에 여념이 없을 터이다. 그러나 큰 돈 들여 만들어낸 매끈한 구호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 야만의 시절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서글프게도 상식과 인간으로서의 품격,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다.

다시 야만의 시절을 끝내고, “그땐…” 같은 회고담을 나눌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 다짐이 필요한 시간이다. 알고도 속지는 말자. 모르고 속는 짓은 더더욱 하지 말자. 지금 이 나라를 야만의 시절로 되돌려 놓은 이들이 누구인지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이희정 디지털부문장 ja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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