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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목조전실은 신라시대 원형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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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목조전실은 신라시대 원형 아니다"

입력
2017.03.24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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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경 석굴암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910년 경 석굴암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9세기 말 경주 석굴암을 중수할 때 그 내력을 적은 상량문을 통해 석굴암의 원형을 추정한 논문이 나왔다. 이 중수 공사 전에는 목조전실과 같은 목조 구조물이 전혀 없었다는 내용으로 국내에서 이 상량문을 자세히 연구한 것은 처음이다.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무형유산학과 교수는 30일 학술 등재지인 ‘보조사상’에 발표 예정인 논문 ‘석굴암 석굴 중수상동문(重修上棟文ㆍ1891) 연구’에서 이같이 밝혔다. 상동문은 상량문과 같은 말이다.

20세기 초 주실 천장 앞쪽이 무너지는 등 폐허처럼 방치돼 있던 석굴암을 1910년 일제가 보수했다. 지금과 달리 목조전실을 만들지 않았고, 전정부도 개방했다. 이후 1963년 목조전실을 세우면서 이 전실이 신라 때부터 내려온 원형인지 아닌지를 두고 논란이 지속됐다. 목조전실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목조 전각이 그려진 ‘골굴석굴도’ 등을 근거로 내세웠고, 반대 측에서는 이 그림이 인근의 천연 석굴 사원인 골굴사를 그린 것이라고 반박했다

최 교수에 따르면 상동문 전체 내용 중 1891년 이전의 석굴에 목조전실과 같은 구조물이 있었다는 언급은 전혀 없다. 석재가 땅이 묻히거나 짐승의 발자국에 더럽혀졌다는 말은 있어도, 목재가 부식됐다는 내용은 없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상동문의 몇 가지 키워드를 통해 당시 중수가 원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신규’(新規) ‘초창’(初創) ‘개관’(改觀) 등 단어는 중수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다른 형태라는 점을 명백히 보여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즉 당시 중수는 석굴암의 외형을 바꾸는 작업이었다.

석굴암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최 교수에 따르면 1891년 당시 공사 초점은 ‘기와를 덮는 일’이었다. 상량문의 ‘견보(牽補)’는 ‘견라보옥(牽蘿補屋)’의 줄임말로 담쟁이덩굴을 끌어다가 새는 지붕을 덮는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 공사에서 기와를 덮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최 교수는 설명했다. 이러한 변형은 중국 문화권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용궁(龍宮)의 제도가 거의 복구되었다’는 상동문 내용에서 ‘용궁의 제도’는 중국문화권의 전통적 사원 건축 양식인 ‘상동하우’를 가리킨다. 최 교수는 또 ‘대장(大壯)의 송(頌)’이라는 구문은 대들보를 놓고, 서까래를 드리운 모양인 주역의 대장괘를 강조한 것이라고 봤다. 즉 봉토 위에 기와를 덮고 예배공간인 전정에 들보와 서까래를 올려 외관상 목조건축물의 형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논문에서 “중수 불사와 관련이 있는 순상 조씨 등이 유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상동하우’를 고집하며 결국 실패를 초래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중수 이후 누수현상이 생기고 미관도 크게 해쳤다는 것이다. 따라서 1963년 목조전실 건립 당시 ‘석굴중수상동문’을 하나의 근거로 삼았다면 원형 복원 기준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게 최 교수의 주장이다.

1913년 일본인들에 의해 석굴암 보수공사가 행해졌을 당시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913년 일본인들에 의해 석굴암 보수공사가 행해졌을 당시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석굴중수상동문’은 1924년 일본인 학자에 의해 원문이 공개되고 1963년 목조전실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다시 세상에 알려졌지만 그 동안 이를 연구한 이는 드물었다. 최 교수는 “상동문이 주목 받지 못한 건 변려문(騈儷文)이라는 고급 문체로 쓰여 번역이 어려운 특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치원 연구의 권위자인 최 교수는 2,400쪽 분량의 ‘한국유학통사’를 내기도 했던 고문(古文) 전문가다.

최 교수에 따르면 지금까지 발견된 상량문 이전의 고문헌에도 석굴암에 목조 구조물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는 “상동문에서 석굴이 본디 탈해왕의 신전이었음을 강조한 것, 석굴 본존불의 시선이 문무왕의 대왕암과 일직선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제기한 것 등은 석굴을 보다 깊이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며 “석굴 원형에 대한 논의가 다시 활발하게 이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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