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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같이 쉽시다!”

입력
2017.10.1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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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격차는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권을 침해하는 역사의 적폐다. 경제민주화전국네트워크와 전국서비스산업노조 등 시민노동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27일 추석 연휴를 앞두고 서울역 앞에서 ‘추석 명절 단 하루만이라도 함께 쉬자’고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휴식격차는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권을 침해하는 역사의 적폐다. 경제민주화전국네트워크와 전국서비스산업노조 등 시민노동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27일 추석 연휴를 앞두고 서울역 앞에서 ‘추석 명절 단 하루만이라도 함께 쉬자’고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휴일이 열흘이나 되는데 왜 학원비랑 유치원비를 다 내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30%는 깎아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학원에 전화해서 따졌는데도 안 깎아준다는 거야.” “저는 아예 10월 한 달은 등록을 안 했어요.”

건국 이래 최장 연휴를 보내는 즐거움의 와중에 명절증후군 격정토로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들은 얘기들이다. 적게는 몇 만원에서 많게는 수십 만원씩 내는 교육비가 슬슬 아까워지면서 본전 생각이 나는 때가 바로 연휴다. 겨울방학이나 여름방학이 들어 있는 달이면 학부모들 사이에서 늘 나오는 얘기고, 올 5월 황금연휴에도 거르지 않고 돌았던 레퍼토리다. 교육비만도 아니다. 베이비시터든 가사도우미든, 우리가 고용인이 돼 월급제 임금을 지불하는 모든 피고용인이 시시때때로 저 ‘아까워 죽겠다’의 간접목적어가 된다.

보통은 속으로만 ‘그게 아닌데’ 생각하고 말지만, 친한 사람 앞에서는 불쑥 못된 말투가 나오기도 하는 지병이 있는 바. 이번 연휴, 그만 저지르고 말았다. “그럼 자기도 월급을 70%만 받지 그래? 그 사람들은 연휴 기간 밥 굶고 있나?” 몹시 좋아하던 사람에게 쏘아붙이고 아차 싶던 차에 착하고 다정한 그가 말했다. “어, 생각해 보니 그렇네.” 미안하다, 사랑한다.

나의 휴일은 유급이고, 너의 휴일은 무급일 수는 없다. 내게 쉼이 긴요하다면, 너에게도 쉼은 필요하다. 비정규직에게도 정규직에게도, 삶은 언제나 정규적이어서 쉬든 일하든, 우리는 언제나 돈이 필요하다. 시간은 사계의 흐름이라는 보다 긴 관점에서 이해돼야 한다. 노동의 순간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쉼과 노동이 적절히 안배된 보다 거시적 관점에서 노동자의 삶을 바라봐야 한다. 10월 한 달 학원등록을 안 하는 것이 가계운영자로서는 알뜰한 선택일 수 있겠지만, 우리가 10월 한 달만 사는 사람들은 아니지 않은가. 비수기에는 직원을 자르고, 성수기에만 고용을 유지하는 기업이나 자영업자들도 적잖다. 성수기에 벌어들인 초과 이익은 고용주의 것이고, 비수기에 발생한 손해는 노동자의 것이다. 이러고도 열심히 일 잘하는 직원을 기대한다면 뻔뻔하기 짝이 없는 행태다.

역대 최장 연휴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따지고 보면 원래 쉬어야 할 날들을 모아서 쉰 것뿐이다. 매년 9월에 쉬었던 추석 연휴를 일하며 보냈으므로 우리는 9월에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벌었다. 개천절도 한글날도 대체휴일도 어느 해에나 있었던 법정공휴일이다. 문제적이라면 10월2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한 것인데, 공휴일이 아니었어도 쉴 사람들은 연차로 소진했을 날이고 연차를 쓸 형편이 못 되는 사람들은 대체로 나와 일했다. 흩어져 있던 휴일을 모아서 쉰 것을 두고 없었던 휴일을 만들어 쉰 것처럼 말하는 것은 조삼모사일 뿐이다.

오히려 문제인 것은 현행 법률이 법정공휴일을 반드시 쉬는 날로 규정하지 않아 벌어지는 휴식격차다. 쇼킹하게도 현행 근로기준법은 노동자가 반드시 쉬어야 하는 유급휴일을 일주일에 하루 쉬는 주휴일과 5월1일인 노동절로만 규정해 놓았다. 개천절, 한글날 등 5대 국경일과 설날, 추석 등 온갖 법정공휴일들은 대통령령인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명시돼 있는, 그저 관공서가 문을 닫는 날일 뿐이다. 민간기업은 취업규칙과 단체협약 등을 통해 노사 자율로 쉴지 말지를 결정하게 돼 있다. 그간 빨간 날을 당연히 쉬는 날로 알고 따박따박 쉬어 왔다면, 오, 놀라워라, 그건 사장님들의 하해와 같은 은혜였던 것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권을 침해하는 휴일차별은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저지른 역사의 적폐다. 법정공휴일을 모든 근로자의 휴일로 보장했던 1953년 제정 근로기준법의 해당 규정을 삭제한 5ㆍ16 박정희 군사쿠데타의 잔재가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법정공휴일을 규정하는 법률이 없는 국가가 또 대한민국이다. 이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여러 차례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재계와 자영업자들의 반대로 폐기되기를 반복했고, 현재도 ‘국민의 휴일에 관한 법률안’이라는 동일한 이름으로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2016)과 신용현 국민의당 의원이 지난달 발의한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법률이 모든 기업과 업장에 언제 어떻게 쉴지를 동일한 형태로 강제할 수는 없다는 반론이 있지만, 그것이 원칙을 만들지 못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예외사항은 보완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오래 쉬고 다시 출근하는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던지, ‘어머, 나 일을 하고 싶었나 봐’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미치도록 일을 하고 싶었다는 듯, 격렬하게 키보드를 두드려 본다. “의원님들, 국민의 휴일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되는지 안 되는지 눈 부릅뜨고 지켜보겠습니다.” 휴일격차, 이제는 좀 해소해 보자. 우리, 같이 쉽시다!

박선영 기획취재부 차장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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