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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심야식탁] 하몽 한 조각에 담긴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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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심야식탁] 하몽 한 조각에 담긴 바람

입력
2017.03.2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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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천운영 제공
소설가 천운영 제공

어릴 적에 한동안 내 장래희망으로 순대집 주인을 삼았었다. 나는 순대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이가 나기도 전에 잇몸으로 순대를 빨아먹었으며, 순대 한 토막과 함께면 울지도 칭얼거리지도 않는 순둥이였으며, 거슬러올라 엄마의 입덧을 다스린 것이 다름 아닌 순대였다 하니, 순대에 대한 내 사랑과 충정은 모태신앙에 가깝다 할만 했다.

내가 순대집 주인이 되고 싶었던 것은 순대를 좋아해서만은 아니었다. 일정한 크기로 신속하게 순대를 잘라내는 리드미컬한 손놀림. 순대를 접시에 올린 후 부속물에 칼을 대기 시작하면, 퍽퍽한 간 말고 쫄깃한 오소리감투 주세요 오소리감투, 내내 나를 애태우던 칼의 장악력. 각종 부속물과 특별한 소금까지 위태롭게 담아낸 접시의 아름다움까지. 순대집주인의 손과 칼과 접시는 어린 내가 경험한 가장 강력한 권력이자 기술이자 위엄이었다.

30년 가량 다닌 순대집이 있다. 점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광장시장 어느 즈음 앉은뱅이 의자 몇 개 놓고 벌인 좌판인데, 그것도 오후 4시나 되어야 열린다. 새벽에 받아온 신선한 선지로 속을 채워 삶아 ‘다라이’에 담아 나오면 딱 그 시간. 맛이야 두말할 것 없이 최고다. 그 좌판 주인은 묵묵하게 순대만 썬다. 30년 세월이니 반갑다 잘 지냈냐 여전하다 서로 알은 척을 할만도 하건만, 그저 간보다는 오소리감투를 더 썰어주는 것으로 반가운 마음을 표현한다. 만약 내가 순대집 주인이 된다면 그런 주인이 되고 싶었다. 만들고 썰고 내고 인사까지 모두 한 다라이의 순대에 담은, 그런 묵묵한 주인.

소설가 천운영(가운데).
소설가 천운영(가운데).

스페인에 있을 때 순대만큼이나 하몽을 좋아했다. 종이처럼 얇게 썬 하몽 한 점을 입에 넣으면 신음 소리가 절로 났다. 아, 그 황홀한 감칠맛이라니.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하몽은 보기만 해도 단 침이 돌았다. 하몽집 주인이 칼을 슥슥 갈 때부터 애가 타고 눈길을 떼지 못하다가 한 점 맛보기로 건네주기라도 하면 발을 동동 구르며 받아먹곤 했다. 하몽은 돼지를 소금에 절여 바람에 말려 만든다. 적어도 여섯 달 간의 염장기간과 일년 이상의 자연 건조로 시간이 만들어낸 음식이다. 그걸 확인하게 위해 하몽으로 유명한 고장을 찾아간 적도 있었다.

올리브 숲이 사라지고 도토리나무 숲이 펼쳐진 걸 보고 그곳에 가까워진 걸 알았다. 가도 가도 도토리나무. 차를 세우고 숲으로 들어갔다. 나무 그늘이 향긋하게 서늘했다. 흙 냄새를 품은 바람이 불어왔다. 가끔 양들의 울음소리와 워낭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그곳에서 검은 발굽의 돼지들을 만났다.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이 나무 그늘에서 저 나무 그늘로 옮겨가는 돼지들. 그날 맛본 하몽은 특별히 맛있었다. 그것은 한 점의 염장 돼지고기가 아니었다. 그 한 점은 한 세계였다. 돼지와, 돼지가 먹은 도토리와, 도토리를 키워낸 나무와, 나뭇가지에 부는 바람과, 그 바람에 묻어오는 워낭 소리가 만들어 낸 하나의 세계.

하몽을 처음 잘랐던 순간을 기억한다. 발목에 단도를 찔러 넣었을 때, 바람 소리가 났다. 쉬익. 이어서 가죽 안에 갇혀 있던 기름이 쏟아져 나왔다. 껍질을 들어내고 누르스름한 지방층을 벗겨내자 분홍빛 지방이 나타났다. 그때부터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 한 조각 바람의 세계, 한 조각 숲의 세계.

하몽은 부위에 따라 자르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맛이 난다. 부드럽거나 쫄깃하거나 기름지거나 담백하거나. 하몽을 자를 때면 나도 모르게 입술을 모으고 집중하게 된다. 하몽을 이루고 있는 근육과 지방과 살과 그 외의 모든 것, 하몽 그 자체에. 그렇게 골똘히 하몽을 자르고 있으면 어릴 적 꿈을 이룬 듯한 느낌이 든다. 어쩐지 위엄 있는 기술자가 된 기분. 물론 순대집 주인처럼 하몽을 직접 만들지는 못한다. 그저 하몽을 썰어 접시에 올려낼 뿐. 하지만 어찌 만들겠는가. 하몽을 만드는 것은 태양과 바람과 도토리나무와 소금과 시간인데.

소설가

소설가 천운영 제공
소설가 천운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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