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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진성 - 아버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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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진성 - 아버지의 노래

입력
2016.09.0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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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역에서 다시 만난 내 아버지

“누가 자꾸 너한테 태클을 거냐? 걱정 마. 내가 다 지켜줄게.”

햇살 좋은 가을이었다. 나는 아버지 산소 앞에 앉아 먼 산을 쳐다보며 이런저런 넋두릴 하고 있었다. 문득, 산소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봉분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산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 귀를 울린 건 분명 아버지의 음성이었다. 녹음기를 틀어놨더라면 아버지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담겼을 것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아버지와 마주 앉은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나한테 태클 거는 사람이 한둘입니까? 어릴 때부터 태클투성이로 살아온 게 저 아닙니까!”

그 한 마디에 어린 시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태클뿐인 내 인생……. 생각할수록 너무도 끔찍한 세월이었다. 때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운명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을 만큼.

젖먹이 아들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

내가 세 살 되던 해 어머니가 가출을 했다. 아직 젖도 못 땐 즈음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겠다고 서울로 갔다. 그 뒤로 세 살 터울 형과 나는 친척 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형은 머슴을 살다시피 했고 나는 나대로 눈칫밥을 먹으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나는 영양이 부실해서 네 살이 되어서도 걷지를 못했다. 당시는 홍역으로 죽는 아이들도 많던 시절, 예방접종 한번 없이 살아남은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그 시절부터 노래를 좋아했다. 내가 살던 부안은 매창의 고향이다. 매창(梅窓, 1573~1610)은 황진이와 비견될 정도로 뛰어난 기생이었는데 노래를 잘했다고 한다. 주변 어른들 중에도 소리를 빼어나게 잘하는 분들이 많았다. 나는 그들의 소리를 귀동냥으로 배우기도 하고 라디오 등으로 가요를 접하기도 했다. 어디를 가든 집밖으로 나서면 늘 노래를 부르면서 걸었다. 가요 중에는 ‘가지마오’, ‘여자의 일생’, ‘기러기 아빠’ 같은 노래를 자주 불렀다.

산에는 진달래 들엔 개나리

산새도 슬피 우는 노을 진 산골에

엄마구름 애기구름 정답게 가는데

아빠는 어디 갔나 어디서 살고 있나

아아아, 우리는 외로운 형제 길 잃은 기러기

노래를 부르면서 걷다보면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들에서 일하고 있던 어르신들이었다.

“성철아, 욜로 와서 밥 무그라잉!”

부모 없이 자라는 내가 측은했던지 밥을 먹이고 가끔 1원짜리 동전도 쥐어줬다.

“너는 나이도 애린 놈의 새끼가 뭔 노래를 그라고 서럽게 불러부냐.”

그렇게 타박 아닌 타박도 했다. 그때는 슬프거나 외롭단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넘듯이 한끼 밥 무사히 먹고 하루 별 탈 없이 나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노래는 가슴 밑바닥에 차곡차곡 묻어둔 슬픔과 원망이 나도 모르게 밖으로 흘러나오는 계기였다.

어머니를 다시 만난 것은 열한 살 무렵이었다. 외삼촌이 내가 살던 마을을 찾아왔다. 두 번은 헛걸음을 했고 세 번째 방문에서야 나를 만났다. 삼촌이 나를 보며 물었다.

“엄마 보러 서울 갈래?”

나는 엄마란 말에 외삼촌을 실긋하게 쳐다보며 이렇게 대꾸했다.

“그 여자가 뭣허러?”

‘엄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음에 쌓인 원망이 ‘그 여자’란 말을 툭 튀어나오게 했다.

나는 외삼촌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것은 평소에 가지고 싶었던 장난감을 하나 사주면 서울로 따라가겠다는 것이었다. 외삼촌은 읍내에 나가 그 장난감을 사왔다. 나는 그 장난감을 들고 동네를 한 바퀴 돈 다음에 외삼촌을 따라 서울로 가는 길에 올랐다.

부안군 행안에서 김제까지 나와서 십이열차를 탔다. 완행열차는 고인 물에 뜬 나뭇잎처럼 한없이 느릿하게 흘러가더니 새벽녘에 되어서야 서울에 도착했다. 외삼촌을 따라 용산역에서 내렸다.

“성철아!”

용산역 파출소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눈시울을 붉혔지만 나는 덤덤했다. 어색한 시간이 싫었다.

우리는 거기서 다시 구파발로 향했다. 지금은 서울이지만 당시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에 속해 있었다. 근처에 진관사가 있는 곳이었다.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 외가에 도착했다. 할머니 한분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나를 끌어안았다. 외할머니였다.

“아이고, 내 새끼!”

나는 화가 치솟았다. 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왜 이 호들갑인가 싶었던 거였다. 그 상봉이 외가 식구들에겐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불쾌하기까지 한 경험이었다.

얼마 후 아버지가 돌아왔다. 외삼촌의 중재로 어머니와 아버지, 형과 나 모두 한 집에 모여 살게 되었다.

부모님이 자주 다투었다. 한번은 부부싸움 도중에 외삼촌이 들이닥쳤다. 그날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지붕이 들썩거릴 정도로 고성을 지르며 싸우고 있었다.

“가자!”

외삼촌이 어머니의 손을 낚아채 밖으로 나갔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 나갔다. 어머니를 따라 가야 배곯을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가 올라탄 버스 번호를 기억한다. 북가좌발 157번 버스. 어머니가 먼저 차에 올라탔고 삼촌이 훌쩍 뛰어올랐다. 몇 발짝 뒤에서 걷던 나도 버스에 발을 올렸다. 그때였다. 외삼촌이 내 가슴팍을 발로 찼다.

“철퍼덕!”

비온 뒤였고, 길은 포장이 안 돼 진흙탕이었다. 나는 버스에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순간 어머니를 비롯해 외가 쪽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돌덩이처럼 마음을 짓이겼다. 그후로 오랫동안 어머니와 외삼촌을 원망했다. 심지어 복수를 해야겠단 마음까지 들었다.

유랑 극단에서 무대 생활 시작

그 버스 사건 이후로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기댈 데라곤 노래밖에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한때 몸담은 적이 있는 유랑극단에 들어갔다.

내 노래 실력은 사실 아버지의 유산이다. 아버지는 노래를 잘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노래 실력에 반해서 결혼을 하셨으니까. 그래 그런지 아버지와는 무언가 통하는 것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 어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 음성이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란 생각에 아버지의 삶을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건 남자끼리의 혹은 ‘가수’끼리 통하는 의리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 나는 어렴풋이나마 내 인생길이 아버지의 소리 길을 따라가게 될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노래는 좋았지만 유랑은 힘들었다. 당시 유랑극단은 서울에서 조를 짜서 지방으로 내려갔다. 공연팀을 짤 때 메인가수들 외에 2진, 3진 가수 군을 따로 모았다. 지방은 주로 2진, 3진들이 돌았는데 나는 ‘땜빵 가수’였다. 가수가 부족하면 내가 거기에 들어갔다. 요즘으로 치면 ‘트로트 신동’쯤의 타이틀을 달고 출연했다.

공연복도 따로 없었다. 아버지가 입던 한복 저고리를 줄여서 입었다. 거기서 ‘가지마오’, ‘기러기 아빠’ 같은 트로트 명곡을 불렀다. 무대에 서지 않을 때는 청소나 허드렛일을 했다.

그 시절 기억나는 일은 김용임을 만났던 것이다. 내가 12살, 용임이는 8살이었다. 나처럼 트로트 신동이었는데, 요즘 신동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노래를 구성지게 잘 불렀다. 어른들이 너무 좋아했다. 그때 이미 대형 가수로서의 가능성이 확인된 셈이었다.

17살 때부터는 야간 업소에 나갔다. 야간 업소는 20살이 넘거나 부모 동의가 있어야 출연할 수 있었지만 친척 형에게 등본을 부탁해서 그걸 내밀었다. 나이를 속이고 가짜 이름을 썼다. 그렇게 본격적인 무대 생활을 시작했다.

내게 이십대는 너무도 처절하고 외롭고 서러운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기댈 부모가 없다는 것이 한스러웠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돌아갈 고향 같은 부모가 있어야 힘이 날 텐데, 나는 오로지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터널 같은 이십 대를 지나 92년, 드디어 내 곡을 발표했다. ‘님의 등불’. 큰 반응은 얻지 못했지만 내 곡을 가졌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내가 가수로서 내 이름을 그나마 알리기 시작한 건 2002년 발표한 ‘내가 바보야’였다. 그렇다고 뜬 건 아니었다. 여전히 무명이었다. 왜 이렇게 지지리도 되는 일이 없나 속이 타는 시간들이었다.

아버지 산소 앞에서 만든 곡

“예, 아버지. 내가 아버지 믿고 한번 해볼게요!”

산소에서 환청을 듣고 나서 곡을 하나 썼다. 아버지의 음성과 내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담았다. 멜로디도 즉석에서 떠올랐다. 제목은 ‘태클을 걸지마’로 붙였다.

어떻게 살았냐고 묻지를 마라

이리저리 살았을 꺼라 착각도 마라

그래 한때 삶의 무게 견디지 못해

긴긴 세월 방황 속에 청춘을 묻었다

어허허 어허허 속절없는

세월 탓해서 무얼해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인 것을

지금부터 뛰어

앞만 보고 뛰어

내 인생의 태클을 걸지 마!

나는 이 노래가 아버지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노래는 발표하자마자 중장년층 사이에 빠르게 파고들었다. 요즘도 행사장에 가면 이 노래를 앵콜곡으로 신청하는 분들이 종종 있다. 아버지의 위로와 내 인생의 진한 고백이 담긴 노래다. 가장 애착이 간다.

2005년 아버지 덕분에 얻은 ‘태클을 걸지 마’ 이후 일이 술술 풀려가기 시작했다.

2010년, 드디어 내 인생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봄날, 병걸이 형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병걸이 형은 이십대 때 만났다. 그때는 형이나 나나 모두 무명이었다. 이후 형은 ‘다함께 차차차’, ‘찬찬찬’ 등의 노랫말을 지어서 인기 작사가의 반열에 올랐다.

“너 노래 한곡 불러라.”

안동시에서 안동을 주제로 한 노래를 모아서 시디를 내는데, 거기에 본인의 창작곡을 하나 넣기로 했다고 했다.

“네 목소리하고 어울릴 것 같아. 네가 한번 불러봐라. 수고비 좀 줄게.”

나는 워낙 친한 형의 부탁이라 그러겠다고 하고 녹음실로 뛰어갔다. 녹음실에서 악보를 받아 십 분 정도 연습한 뒤에 바로 녹음을 했다. 노래를 하면서 괜찮은 곡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 뒤로 잊었다.

그 곡으로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인터넷을 중심으로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삼 년쯤 흘렀을 때 병걸이 형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이 곡을 달라는 가수들이 많다. 네가 가져가서 활동해라.”

나는 당장 편곡작업을 거친 뒤 녹음을 했다. 새로 녹음을 해서 곡을 내놓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불과 몇 달 만에 내 노래가 고속도로를 점령했다. 고속도로마다 내 노래가 흘러나왔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음반을 파는 분들은 ‘촉’이 상당히 발달해 있다. 대중이 호응할 만한 노래가 나왔다면 하면 바로 알아보고 홍보에 들어간다. 될성부른 나무다 싶으면 바로 거름을 주는 것이다.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내 노래가 흘러나오던 때의 흥분을 잊을 수 없다.

노래의 제목은 ‘안동역에서’, 2014년 초에 멜론, 저작권협회 모니터링 1위, 검색순위 1위, 유흥, 단란주점, 노래방 선곡 1위 등 모든 차트에서 1위를 달렸다.

이 곡은 영호남이 한데 어우러져 탄생한 명곡이다. 작사를 한 병걸이 형은 경북 예천 출신이고 작곡가 최강산 씨는 포항 사람이다. 노래를 부른 나는 전북 부안이니 노래 한곡에 영호남이 손을 잡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경상도에서 호남 사투리 써가면서 활동하는 가수는 남진 선배님하고 저밖에 없습니다!”

‘비 내리는 고모령’을 잘 불렀던 아버지

안동역에서가 흥행하면서 나는 다시 아버지의 산소를 찾았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안동역에서도 아버지 덕인 것 같습니다.”

사실 아버지도 경상도 노래를 사랑했다. 아버지가 제일 즐겨 부른 노래는 ‘비 내리는 고모령’이었다. 경상도 대표곡이자 대구를 상징하는 노래였다. 부자지간에 ‘평행이론’이 성립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버지의 ‘비 내리는 고모령’에는 깊은 사연이 있다. 아버지 역시 징용 피해자였다.

아버지가 17살 나던 해 일본 순사가 집으로 들이닥쳤다. 아버지 형제는 2남 1녀. 위로 형님이 있었다. 순사가 “누가 형이냐?”고 물었다. 당연히 형님을 지목했다. 그런데 형사는 아버지를 끌고 가 버렸다. 아버지의 키가 형님보다 한 뼘이나 더 컸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전장의 한 복판으로 끌려갔다. 아마 중일전쟁이었던 듯하다. 당시 조선인들은 총알받이였다. 전장에 투입되면 살아 돌아오기 힘들었다. 집안에서도 다시는 못 볼 거라고 생각하면서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어머니!”

아버지는 다행히 2년 만에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다시 전장으로 갔다. 일제에 끌려가서 죽을 고비를 당한 것이 분했던지 이번에는 광복군을 지원했다. 광복군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왔다.

아버지의 마지막 전쟁은 6.25였다. 어찌 보면 가장 비극적으로 다가왔을 전쟁인지도 모른다. 어제까지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공동의 적과 싸우던 사람들과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총부리를 겨누었으니 그 마음이 어땠을까. 6.25도 무사히 넘겼지만, 마음으로는 몇 번이나 죽었다 살아난 전쟁이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참전 경험은 ‘비 내리는 고모령’뿐 아니라 ‘안동역에서’란 노래와도 연결된다. 노래의 배경이 되는 안동역에는 아버지가 참전하던 시절을 살았던 분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온다.

안동역사 주차장 뒤편에 오래된 벚나무가 있다. 이 벚나무와 함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온다. 사연은 이렇다. 해방 이전 어느 겨울, 아가씨 하나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쓰러졌다. 이 모습을 본 젊은 역무원이 아가씨를 역무실로 데려와 정성스럽게 간호해주고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데이트 장소는 역사 뒤뜰이었다. 두 사람은 어느 봄에 벚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사랑의 징표였다.

얼마 뒤 남자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일본 형사가 그를 쫓았던 것이었다. 사실 그는 비밀 독립운동단체의 단원이었는데, 일제가 이를 눈치 챈 것이었다. 그는 만주로 떠났다. 남자가 떠난 후 여자는 수시로 역사에 들러 벚나무를 돌보며 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해방이 되고 얼마 안 있어 전쟁이 터졌다. 그녀는 피란을 떠났다가 돌아와 제일 먼저 벚나무를 찾았다. 오래 전 사랑의 징표로 심었던 나무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벚나무 아래 꿈에도 그리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 어쩔 수 없이 북한군에 편입되어 안동까지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벚나무와 마주한 순간 도저히 안동을 떠날 수 없어서 국군에 투항을 했습니다. 날마다 이 주위를 맴돌면서 여직껏 당신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그가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던 어느 날에는 폭설이 쏟아지지 않았을까. 전장에서 겪었을 무수한 죽음의 고비와 사랑하는 사람의 달콤한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어지럽게 뒤섞였을 것이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을 걸으면서 눈물어린 연가를 읊조리듯 부르지 않았을까. ‘안동역에서’의 노래가사처럼 말이다.

바람에 날려버린 허무한 맹세였나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사람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오지 않는 사람아

안타까운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기적소리 끊어진 밤에

요즘 말로 구전 속의 남자는 아버지와 싱크로율이 90%는 넘는 것 같다. 그도 어쩌면 비밀 독립단체에 들기 전 징용에 끌려갔다 왔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버지와 나이도 비슷했을 것이다. 만약 두 사람이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면 전쟁과 사랑 이야기로 밤을 꼬박 새우고도 할 말이 가슴에 남지 않았을까.

‘비 내리는 고모령’과 ‘안동역에서’는 내 아버지의 노래나 다름없다. 아버지의 삶이 노래 속에서, 아들의 음성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안동역에 내 노래비가 세워지던 날 가슴이 그토록 쩌릿쩌릿했던 것도 단순히 내 노래가 담긴 비석이 생긴다는 흥분보다 아버지와 가장 비슷한 삶을 살았던 사람의 사연이 스민 곳에 내 목소리가 스민 비석이 들어선다는 감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가수 진성씨가 미스경북선발대회에서 자신의 히트곡인 '안동역에서'를 열창하고 있다. 김민규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가수 진성씨가 미스경북선발대회에서 자신의 히트곡인 '안동역에서'를 열창하고 있다. 김민규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모두 보통의 삶을 산 분들은 아니었다. 그렇게 서먹하고 원망 많은 부모 자식 간도 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당신의 삶을 들여다볼수록 남자로서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다. 아버지는 어쩌면 당신과 가장 닮았고, 또 당신의 삶을 깊이 이해하는 아들을 통해 못다 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가 너한테 태클을 거냐? 내가 다 지켜줄게!”

무덤가에서 들었던 아버지의 환정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간주가 흘러나오면 속으로 아버지에게 이런 말씀을 올린다.

“아버지, 아버지가 주신 노래들 열심히 부를게요. 살아서는 부자의 정을 거의 못 나눴지만 이렇게 노래로라도 자식 노릇 톡톡히 할 테니까 서운한 것 있더라도 다 마음 푸세요. 안동역에서 부를 때마다 아버지를 기억하겠습니다! 어머니도 제가 성심껏 돌봐드릴 테니까 안심하고 푹 쉬세요!”

윤희정기자 yoo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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