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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띵~동! 취미가 배달 왔어요… 똑~똑! 그림 배우러 왔어요

입력
2018.07.11 04:40
수정
2018.07.12 10:19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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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까’ 조차 고민 말자

다양한 취미 정기 배송 이용

대디 스쿨ㆍ수제 맥주 만들기 등

문화센터도 워라밸 놀이터 변신

직장 승진ㆍ퇴직 후 삶 등 걱정에…

상당수는 자기 계발에 시간투자

직장인들이 퇴근 후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그림 그리기 강좌에 참여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신세계백화점 제공
직장인들이 퇴근 후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그림 그리기 강좌에 참여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신세계백화점 제공

직장인 권종헌(30)씨는 특이한 ‘배달의 민족’이다. 그가 집에서 배달받는 건 자장면이 아닌 취미다. 매달 한 번씩, 새로운 취미가 상자에 담겨 온다. 권씨의 집 선반엔 렌즈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핀홀카메라와, 레고처럼 장난감 블록을 조립해 만든 오드리 햅번(1929~1993) 브릭픽셀아트가 놓여 있었다. 권씨가 모두 퇴근 후 집에서 만든 ‘작품’이다.

직장인 권종헌씨가 지난 5일 퇴근 후 서울 송파구에 있는 집에서 페이퍼커팅을 하고 있다. 단순히 종이 자르기로 치부하면 안 된다. 페이퍼커팅은 미술의 주요 장르다. 대림미술관은 지난 5월 페이퍼커팅 전시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양승준 기자
직장인 권종헌씨가 지난 5일 퇴근 후 서울 송파구에 있는 집에서 페이퍼커팅을 하고 있다. 단순히 종이 자르기로 치부하면 안 된다. 페이퍼커팅은 미술의 주요 장르다. 대림미술관은 지난 5월 페이퍼커팅 전시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양승준 기자

워라밸세대가 취미를 사는 이유

권씨는 퇴근 후 집에서 할 소소한 놀이를 찾다 우연히 알게 된 취미 정기 배송 서비스에 발을 담갔다. 일과 삶의 균형 즉 ‘워라밸(Work & Life Balance)’을 고민하다 내디딘 신세계였다. ‘무엇을 해야 할까’란 고민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누군가 선별해 준 취미를 손쉽게 즐길 수 있다는 데 끌렸다고 했다. 권씨는 “입사한 뒤 생각해 보니 일에 쏟는 에너지 비중이 너무 높더라”며 “먹고 자는 것 외에 날 위해 시간을 내고 거기에 에너지를 쓰고 싶어 다양한 취미를 찾게 됐다”고 말했다. 취미 정기 배송 서비스회사 하비인더박스의 조유진 대표에 따르면 25~35세가 주 고객이다. 이 소비층은 2년 전 9월 서비스를 시작했을 때보다 올해 4배(6월 기준)가 늘었다. 취미를 사는 사람, ‘호모 하비바이(Hobby Buy)쿠스’의 등장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여기지만, 치열한 경쟁 사회에 내몰려 제대로 취미를 계발할 시간조차 부족했던 워라밸 세대(1988~1994년생)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권씨가 다니는 회사는 이달부터 근무 시간 이후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지는 ‘PC오프제’를 도입했다. 주 52시간 근무 시범 운영의 일환이다. 근무 체계 변동을 맞아 권씨는 “책 발간”이란 목표를 세웠다. “직장인이 되기 전 하고 싶었던 일을 돌아보다” 뒤늦게 찾은, 옛 꿈이라고 했다.

롯데백화점문화센터의 한 요가 강좌. 20~30대 직장인이 과반을 차지한다. 롯데백화점 제공
롯데백화점문화센터의 한 요가 강좌. 20~30대 직장인이 과반을 차지한다. 롯데백화점 제공

아빠 육아 강의 듣고, 피아노 배우고

직장인의 ‘밤’이 달라지고 있다. 워라밸을 향한 시대적 열망에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까지 맞물리면서 변화의 속도는 가속 페달을 밟았다. 직장은 내 전부가 아니라고 외치는 워라밸 세대가 앞에 서서 변화를 이끌고 있다. 워라밸 세대에 정시 퇴근과 퇴근 후 삶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나’와 여가를 중시하는 새로운 직장인의 등장은 사회 곳곳의 풍경까지 바꿔 놓고 있다.

워라밸 세대는 백화점 문화센터의 주요 고객으로 떠올랐다. 신세계백화점에 따르면 지난 6월까지 문화센터 수강생 중 20~30대 비율이 과반(59%)을 차지했다. 35%(2013)에 그쳤던 5년 전보다 24%포인트 늘었다. 2000년까지만 해도 가사에 전념하는 중년 여성의 주요 문화 공간이었던 백화점 문화센터가 워라밸 세대의 놀이터로 탈바꿈하고 있다. 워라밸 세대들이 회사 문을 나서 나를 찾기 위해 접근성이 좋은 백화점 문화센터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워라밸 세대가 주 고객으로 떠오르면서 백화점 문화센터 강좌 내용도 바뀌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올해 여름 시즌부터 워라밸 파트를 신설, 아빠들의 육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강의 ‘아빠 휴직: 대디 스쿨’까지 열었다. 재테크를 비롯해 수제 맥주 만들기 등 다양한 생활밀착형 강의가 인기다. 워라밸 세대의 취미 찾기 바람은 동네 학원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미술이나 피아노 학원을 찾는 젊은 직장인들이 부쩍 많아진 덕분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예술 학원 수강자는 2013년 4만2,462명에서 2016년 19만3,258명으로 급증했다. 퇴근 후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집 근처에서 기타 교습을 받는 직장인 고재민(34)씨는 “더 늦기 전에 악기를 하나라도 다루고 싶어 5월부터 배우고 있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퇴근 후 취미를 찾는 워라밸 세대를 잡기 위해 해가 지는 저녁에 문을 여는 책방도 늘고 있다. 연희동의 밤의 서점과 염리동의 퇴근길 책 한잔 등이다. 남지영 밤의 서점 점장은 “주로 30대 여성 직장인들이 퇴근 후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하루 강의로 자기계발 ‘패스트 워라밸’도 등장

하지만 워라밸에 닫기까지의 여정은 아직 멀어 보였다. 회사 밖에서 놀거리를 적극적으로 찾는 이들이 많이 늘었다고 하나, 상당수는 경력 계발에 집중하고 있다. 고용 불안에 시달리다 보니 퇴근 후에라도 퇴직 후 삶에 대한 준비를 해 둬야 한다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이후 자기계발서 판매도 부쩍 늘었다. 영풍문고에 따르면 지난 1일부터 4일까지(일~수요일) 자기계발 서적 판매량이 전주 같은 기간 대비 2배 늘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 등 이 시대 멘토들의 조언이 담긴 책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가 1위였다.

직장인 20~30대는 퇴근 후 가장 하고 싶은 일로 ‘외국어 공부 등 자격증 취득(약 23.8%)’을 꼽기도 했다. 20~50대 직장인 269명을 대상으로 지난 3일부터 5일까지 한국일보가 온라인 설문을 진행한 결과다. “회사가 날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입사 전보다 퇴보한 스펙” 등이 이유였다.

‘눈높이 교육’이라는 광고문구로 유명한 구몬학습은 성인회원이 2013년 1만1,000명에서 지난해 5만4,000명으로 약 5배나 늘었다. 시간에 쫓겨 학원 가기 어려운 직장인들이 자기계발을 위해 학습지 시장으로 눈을 돌린 결과다.

지혜원 대중문화평론가는 “경쟁에 시달린 워라밸 세대의 불안이 취미를 사거나 부담 없는 원데이 클래스(하루 만에 끝내는 강의)를 선호하는 등 짧은 시간에 워라밸을 추구하려는 ‘패스트 워라밸’로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현실적 워라밸이 아직 장밋빛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워라밸 패턴이 자유롭기보다 여전히 수동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이라고 봤다.

“’워라밸’은 사치”라는 50대의 반감

설문 결과 ‘워라밸 리스트’는 생애주기별로 현저하게 달랐다. 워라밸 세대 뿐 아니라 40대도 워라밸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이한 건 50대의 반응이었다. 설문에 응한 50대의 33%는 “워라밸은 생각해 본 적도 없다”며 반감을 보였다. 열 명 중 한 명꼴로 워라밸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40대와 비교해도 유독 저항이 셌다. 김 평론가는 “50대는 압축성장을 이끈 산업화의 마지막 세대로 열심히 일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강박을 갖고 있다”며 “이 세대에 워라밸이란 화두는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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