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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뾰족한 창을 들어라

입력
2018.01.10 15:14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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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국제전문가 양성 프로그램 면접에 참여했다. 단기 계약직이고 급여도 높지 않았지만, 국제무대 경력을 꿈꾸는 지원자들이 몰렸다. 소위 명문대 출신이나 해외 유학한 고스펙 지원자들이 많았다. 최종 면접에 올라온 지원자 상당수는 과분한 느낌까지 들었다.

간단히 자기소개를 해 보라는 요구에 첫 지원자는 머뭇거리지 않고 자기소개서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읊었다. 긴장해서겠지. 하지만 검정색 정장과 같은 헤어스타일을 한 지원자 모두 스스로를 ‘정직과 신뢰’, ‘배려와 봉사’ 등 몇 가지 패턴으로 표현했다. 취업 스터디 그룹을 조직한 것을 최대 경쟁력으로 소개한 마지막 지원자에게서는 정형화한 면접 준비의 정점을 보았다. “인터넷을 없애야 해.” 옆 면접위원의 나지막한 혼잣말이 들렸다.

수많은 관문을 뚫고 거기까지 왔을 지원자들에게서 문득 중세 전쟁 영화에서 보았던, 뭉툭한 창을 들고 잔뜩 겁 먹은 병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영화에서는 뾰족한 창을 들고 빠르게 달리는 장수들만 살아남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타도 뭉툭한 창을 들고서는 상대방을 제압할 수 없다. 뾰족한 창은 자신의 전문성이다. 남과 다른 경쟁력을 적어도 하나는 갖춰야 자신을 지키고 살아남을 수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선행학습으로 쉼 없이 달려온 학생들이 입시를 거치고 나서 정작 뛰어야 할 본선에서 맥없이 뒤처지는 모습을 자주 본다. 전문성을 키워줄 전공지식은 오히려 빈약하고, 비인기 전공 출신은 오히려 감추려고 애쓰기도 한다. 취업준비를 위해 전공수업이나 시험을 빼달라는 요청을 당당하게 하는 것도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스펙 관리는 많은 경우 별로 쓸모 없는 지식을 요구한다. 많은 취업 준비생들이 학원을 돌며 사람들 사이에 묻혀 잠시 불안을 덜고, 늦은 밤까지 인터넷으로 또래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훑으며 남과 같아지기 위한 거대한 수렴과정에 편입된다. 그 와중에 창은 점점 무디어지고, 거대한 패배자 집단이 형성돼 간다.

문제는 그들의 무대가 이미 국제화된 세계의 한복판이라는 점이다. 우리 내부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바깥의 경쟁자들도 제쳐야 한다. 불행히 어느 나라에서도 원하는 고용을 만들어 내고 보장해 줄 역량을 전적으로 가진 국가나 기업이 없다.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는 분야와 기업만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너는 몇 등이니?’라는 평가는 우리가 원치 않아도 실시간으로 국제무대에서 매겨진다. 무한경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공무원이나 공공 분야로 돌진하는 모습이 지금의 현실이지만, 그 또한 근본적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 역시 불편한 진실이다.

“그래, 귀가 따갑게 들었던 세계화 논리잖아.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미 반세계화의 시대로 접어들지 않았나?” 좌절하는 젊은 세대들은 외친다. 하지만 경제의 절대 부분을 대외 교역에 의존하는 나라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논하지 않고서는 생존하기 어렵다. 그간 식상할 정도로 외쳤던 세계화의 상당부분은 여전히 외형에 치중돼 질적인 단계로 충분히 진화하지 못했다.

취업의 공정성과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부모 세대가 노후를 포기하면서까지 쏟아 부은 젊은 세대의 경쟁력이 무뎌지지 않게 하는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하다. 임계치에 이른 치열한 교육열과 경쟁이 안으로 향하는 순간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그 거대한 역량을 밖으로 끌어 낼 수 있는 국가경쟁력 모델이 필요하다. 외국어 구사 능력은 여전히 유용한 경쟁력의 핵심 요소이다. 전문가라는 거창한 호칭을 붙이지 않더라고 자기 분야에서 끝이 뾰족한 창 하나는 들어야 하고, 학교와 사회가 젊은 세대들에게 그럴 기회와 시간을 주어야 한다. 국가경쟁력은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밖에서 보는 한국은 결국 하나의 모습이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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